어느 배에서 있었던 이야기. 부자 승객들은 서로 자신의 재산을 견주며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대인 랍비가 “내가 제일 부자이지만 지금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얼마 후 해적이 그 배를 습격해 승객들은 갖고 있던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낯선 항구에 닿았다. 랍비는 그 곳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 작해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었으나 부자 승객들은 가난뱅이 처지로 전락했다. 그 들은 “확실히 당신의 말이 옳았소. 학식과 교양이 가장 큰 재산입니다”라고 말했 다.



미래산업을 맨 손으로 창업한 정문술 전 회장은 자식에게 집 한 채와 학비만 도와 주고, 그 외는 일절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회사를 딱 한 번만 방문하고 싶다는 며 느리의 간곡한 요청조차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피땀 흘려 번 재산 대부분을 사회 에 내놓았다. 모든 기업인에게 정씨와 같이 엄한 잣대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재벌가나 서민이나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다.

지난해 ‘유 에스 트러스트’가 발표한 미국 부유층의 걱정거리 1위는 놀랍게도 자 식들이 장래에 혹시 생활고에 허덕이면서 살아가지 않을까에 대한 염려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계적 부자(1억~10억원)와 상대적 부자(10억~1000억원)는 부의 증대 와 지속적 소유에 치중하는 반면, 절대적 부자(1000억원 이상)는 부의 안전한 이전 에 관심이 많다”는 연구조사도 나와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증여세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지만 정 작 본인은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합법적인 절세가 최우선 고려사항 이었다면 지금은 기업 규모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이 광범위하게 요구되는 분위기다 . 삼성이 초일류 기업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다고 멀쩡한 그룹을 쪼갤 수 도 없고…. 이 회장 아들이 두 명만 됐어도 문제를 풀기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는 반기업 정서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미국도 산업화 초창기에는 ‘재벌=악덕’이란 수사가 판을 쳤다. 그런 여론을 잠재운 것은 정치적 구호도 아 니고, 시민들의 각성도 아니었다. 공산주의와 극렬 노조를 물리친 공로는 카네기, 록 펠러, 헨리 포드, 벤더빌트 같은 기업인들의 헌신 덕이었다. 몇 년 전에는 미국 의 갑부들이 부시 행정부의 상속세 폐지 추진에 대해 앞장서 반대한 적이 있다. 지 난 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투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의 워렌 버핏 회 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 본연의 임무는 돈을 버는 것이다. 도덕적 잣대로 기업을 마구 재단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가 보다 성숙한 ‘오너십 소사이어티(소유권이 존중 받는 사회)’ 가 되려면 ‘가진 자’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과 견제보다는 이들의 소유권을 인정 하고 책임의식을 북돋워야 한다. 하지만 기업인들이 먼저 손을 내밀면 한국의 자본 주의는 한 단계 더 성숙할 것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내가 두 발을 딛고 있 는 사회의 협조를 받아서 부자가 됐으므로 ‘내 재산 중 상당 부분은 우리 사회의 것’이라는 생각이 정착돼야 한다. ‘아름다운 부자’는 한국의 희망이다.



많은 재벌가 후손들은 돈 더미에 파묻혀 가족간 등을 돌린 채 ‘불우한’ 인생을 살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창업 1세대에 대해 느끼는 콤플렉스에다가 주위 사람 을 불신하는 정서 장애로 고통 받고 있다. 무분별한 상속과 증여는 감당하기 어려 운 무거운 짐을 이들의 어깨에 올려놓는 자녀학대일지 모른다.



무엇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부자가 3대 이상 이어지기 어렵다 는 말이 있다. 돈 대신 강인한 정신력과 삶의 지혜를 사랑스런 자식에게 남겨주면 어떨까.



[윤영걸 주간국장]

매경이코노미 2006-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