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성공하려면 실력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다. 조직 내의 역학관계를 버텨내고 인간관계 기술까지 충분조건으로 갖춘 후 유리 천장 아래서 고군분투한 뒤에라야 비로소 성공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초경쟁 사회를 상징하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밑바닥에서 출발, 정상에 오르기까지 ‘킬러’ 이정숙의 열정적인 성취 과정에서 성공의 키워드를 읽을 수 있다.





“한때는 하루하루 잘리지 않고 살아남는 게 목표의 전부였죠”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여풍’이 거세다. 사법·행정·외무고시 수석합격을 모두 여성이 휩쓸었을 뿐 아니라 여성 합격자 비율도 행정고시 44%, 사법고시 32% 등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해 서울시 공무원 임용시험에선 여성 합격자의 비율이 66%를 넘어섰다. 실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곳에 여성들이 꾸준히 도전해온 결과다.



그러나 어느 시인의 한탄처럼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당당하게 실력을 겨뤄 막상 사회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 가운데 조직의 상층부까지 올라가는 케이스는 여전히 극소수다. 스타트 라인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스스로 기권을 하거나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실격을 당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조직 내 관계경영을 제대로 모른다면 중간에서 고꾸라지기 십상이다. 특히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자’인 여성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정숙씨(45)는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생존 피라미드 조직으로 불리는 월스트리트에서 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최초의 한국 여성이다. 그녀는 1987년 한국 여성 최초로 월스트리트에 진출해 13년 동안 국제 금융의 중앙 무대에서 활동했다. ‘베어링 증권’의 주니어 세일즈맨으로 입사하여 부사장을 역임했고 ‘크레디 리요네’ 이사로 활약하며 서울 지사의 개설을 지휘했다. 월스트리트에서 한국 주식 시장의 전문가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각종 증권 회사의 스카우트 표적이 된 그녀의 별명은 ‘킬러’였다.





그녀는 월스트리트를 가리켜 ‘상어가 득시글거리는 바다’라고 표현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월스트리트 마초들 속에 맨손으로 뛰어든 여자. 돈을 벌어들이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객장에서 갖은 시련 끝에 한 계단 한 계단 성공을 일궈내며 소위 ‘빅 프로듀서’(연간 수백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투자은행의 특급 세일즈맨)로 우뚝 선 그녀는 가히 입지전적이다.





“뉴욕은 세계 금융의 수도라고 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이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되고 그후 전 세계로 퍼져갑니다. 전 세계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를 주목하고 전 세계의 컴퓨터 전문가들이 실리콘벨리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월스트리트는 금융계로 진출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최후의 목적지인 셈이죠. 일만 잘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월스트리트입니다. 연봉도 연봉이지만 실적에 따라 배분되는 연말 보너스가 연봉의 몇 배에 이르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경영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들이 월스트리트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그토록 안달하는 것이구요.





하지만 월스트리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명이 개와 비슷해진다는 농담들을 하곤 해요. 개의 평균 수명은 사람의 7분의 1 가량인데, 월스트리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적, 육체적 압박이 워낙 크기 때문에 여기서의 1년이 바깥 세상에서의 7년에 해당할 만큼 사람이 빨리 늙어버린다는 거죠. 초년병 시절엔 하루하루 잘리지 않고 살아남는 게 제 목표의 전부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두뇌와 승부사들이 몰려드는 세계 경제의 중심, 전 세계를 움직이는 크고 작은 사건에 따라 자본이 이동하는 곳, 인간이 가진 모든 적나라한 욕망의 용광로이며 비열한 생존 피라미드로 얽혀 있는 곳이 바로 월스트리트라는 것이다. 이정숙씨는 최근 월스트리트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담아 「지혜로운 킬러」라는 제목의 책으로 냈다. ‘등 뒤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날아다니는 객장에서 그녀의 존재만으로 열 받는 동료들의 배신, 그녀에게 관심조차 없는 펀드매니저들을 콜드 콜링(cold calling : 안면도 없는 불특정 고객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서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행위)을 통해 낚아채는 과정, 이익을 가로채는 상사와 도와주기는커녕 빈틈만 보이면 정보를 가로채려는 동료들 속에서 그녀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지 흥미진진한 과정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저에게 월스트리트는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업무 시간, 게다가 비열하고 이기적인 동료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모든 요소를 다 모아놓은 곳이었어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 사이에서조차,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온갖 추잡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하지만 오랜 노력 끝에 매도자와 매수자를 한데 엮어서 최종적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짜릿한 환희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나만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아무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어려운 거래를 성사시켰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죠. 동료들은 그런 저의 감각을 ‘킬러 본능’이라고 불렀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본능’이 아니라 ‘열정’에 가까웠던 듯합니다.”





지혜로운 킬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분야에서나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실력을 키우고, 실력이 다시 열정을 북돋우는 선순환의 과정에서 성공이라는 결과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이정숙씨는 그 과정에서 성공을 위한 세 가지 메시지를 추려냈다. 첫째는 어려울수록 도망가지 말라는 것이다.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것은 자신감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위기의 상황에서 도망가는 비겁한 태도는 패배로 이어진다는 것. 두 번째로 쓸데없이 공격하지 말라고 그녀는 조언한다. 눈앞의 이익에 따라 성급하게 행동하기 전에 ‘굿 리스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무기는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다.




대단한 프로, 즉 ‘킬러’는 충분히 듣고 상대방이 나를 완전히 신뢰하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공격한다. 자신만의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대인관계 기술’과 ‘목표 관리 기술을 가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녀는 소리 없이 승리하라고 말한다. 한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지속적인 성공은 쉽지 않다. 진정한 성공은 지속적인 성공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 지혜가 없는 열정은 몸만 고단할 뿐 성과를 내지 못한다. 반대로 열정이 없는 지혜는 냉소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져 결코 대단한 ‘킬러’가 될 수 없다고 그녀는 경고한다.





Success Point 1 말하기보다 듣기가 비결이다!

비즈니스를 시작한 그녀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언제나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녀 자신이 고객을 설득해야 비즈니스가 성사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설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쉽고 간단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사실 가장 어렵고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 바로 ‘듣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인 본성을 타고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쏟아놓고 싶은 욕심이 앞서는 거죠. 그러다 보니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거구요. 나는 지금 딴 생각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그것도 모르고 끊임없이 자기 할 말만 지껄이는 세일즈맨, 그보다 더 피곤하고 귀찮은 존재도 없겠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자제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나부터, 나먼저’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같은 인내심이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고 그녀는 충고한다.





Success Point 2 킬러 본능을 깨워라!

우리말로 ‘살인자’라고 하면 섬뜩한 느낌부터 들지만, 영어의 ‘킬러’는 ‘대단한 사람, 경이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의 속어로 쓰인다.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 고객을 몰아붙이고 언제 빠져나와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판단하는 창의력과 공격적인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그녀 역시 자기 안에 킬러 본능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킬러는커녕 처음에는 당연히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될 거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걸었는데 뜻밖에도 펀드 매니저가 직접 전화를 받으면 너무 당황해서 그냥 끊어버린 적도 많을 만큼 겁도 많고 소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고객의 특성을 파악하면 할수록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설령 100% 확신이 없다 해도 자신감과 권위가 담긴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나를 믿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까다롭고 유명한 펀드 매니저를 만나도 자신 있게 내 아이디어를 소개하거나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죠. 일단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강도로 고객을 밀어붙여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어요. 세일즈의 비밀이 뭔지 아세요? 고객으로 하여금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일깨우는 것이죠.”





Success Point 3 스페셜리스트가 제너럴리스트로 성공한다

그녀는 국제 투자 산업이 커다란 성장기로 들어서는 시점에 월스트리트에 발을 들여놓았고, 더구나 남들보다 먼저 아시아 비즈니스로 무게 중심을 옮김으로써 큰 혜택을 입었다. 덕분에 베어링이라는 브랜드가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캐나다와 같이 특수한 지역을 고객층으로 삼고 점진적으로 세력을 넓혀가는 전략도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좁은 영역의 스페셜리스트로 출발해서 제너럴리스트로 폭을 넓혀 가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얻었다. 유명 기업의 CEO들을 관찰해보면 하나같이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거시적인 안목과 함께 중요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을 겸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위치에서 출발하기보다는 단박에 스타가 되고 싶어해요. 하지만 작게 출발해야 자신의 비즈니스를 반석 위에 올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그래야 위기가 닥쳐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달리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 법입니다. 경기가 좋을 때 뛰어난 실적을 올린 사람을 유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제까지나 마냥 경기가 좋을 수는 없겠죠. 진정한 프로와 아마추어는 바로 불경기에 확연하게 차이를 드러냅니다.”





Success Point 4 진정한 프로는 매사를 쉽게 처리한다

“언젠가 한번은 애널리스트와 함께 리무진을 타고 뉴저지의 어느 보험회사를 찾아가는 중이었어요. 사무실을 출발하기 전에 런던의 거래처와 중요한 거래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는 한 시간 내내 휴대전화로 통화를 했죠. 목적지에 도착해 고객과 점심을 먹는 동안 두 번 더 내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고, 마지막 통화를 통해 결국 거래가 성사되어 우리 회사는 많은 돈을 벌게 됐습니다. 내 고객과 애널리스트는 내가 전화 몇 통으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돈을 버는 것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죠. 물론 그들이 본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몇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그들이 알 리가 없었으니까요.”




야구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면 진짜 프로일수록 매사를 아주 쉽게 처리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외야수가 도저히 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내면 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진짜 프로들은 타자와 투수, 심지어는 경기장의 특성과 바람의 방향까지 미리 계산해서 수비 위치를 조절한다. 덕분에 평소의 위치라면 잡아내기 힘들었을 공을 너무나 쉽고 편안하게 잡아낸다. 그녀 역시 신참 시절에는 옆자리에서 전화 한 통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어들이는 선배들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내두르곤 했다.




“월스트리트지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국제 뮤추얼 펀드 매니저로 뽑힌 제 고객이 있어요. 그의 펀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당시 저는 그를 점심식사에 초대해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그런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더군요. ‘하룻밤 사이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25년을 일했소’라고 말이죠.”





Success Point 5 실력자가 중간에서 고꾸라지는 이유를 아는가

어떤 조직이건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리고 사무실 내의 역학 관계에 대한 정보 수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 이정숙씨는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을 가리켜 각각 ‘성취자’, ‘정치꾼’이라 명명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 두 가지 범주 가운데 어느 쪽에 속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성취자 쪽에 가깝다고 대답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 주변에는 본연의 업무보다는 누구와 손을 잡는 것이 자신의 승진에, 연봉 인상에, 남의 실적을 가로채는 데 유리할까 하는 고민에 전력을 투구하는 기회주의자가 훨씬 많다. 그녀는 자신이 월스트리트에서 저지른 몇 가지 실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고백했다. 그녀 스스로를 성취자로 규정하고 소인배 같은 정치꾼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초창기에는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크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일단 빅 프로듀서로 자리를 잡고 나자 그동안 나를 무시하고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었어요. 나 자신의 상처를 숨기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육책이었던 거죠. 하지만 프리마 돈나 같은 나의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설령 내가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런 태도는 회사 내부에 많은 적을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니까요. 돌아보면 저는 회사와의 원만한 커뮤니케이션 형성에 실패했습니다. 윗사람을 좀더 공경하고 팀원의 하나로서 그들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야 했죠. 남자들은 아무리 동료라 해도 여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도전하는 것을 싫어해요.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 이 둘 사이에 섬세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제력과 성숙함이 필요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