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 보리밭 끝 / 류 근
뚜르 2023.06.05 09:09:37
조회 215 댓글 2 신고

 

 

두물머리 보리밭 끝  / 류 근

 

해 질 무렵 두물머리 보리밭 끝에는

바라볼 때마다 추억까지 황홀해지는 노을이 있고

아무렇게나 건네주어도 허공에 길이 되는

가난한 시절의 휘파람 소리가 있고

녹슨 십자가를 매단 채 빨갛게 사위어가는

서쪽 마을 교회당 지붕들마저 저물어 있다

나는 자주 그 길 끝에서 다정한 생각들을 불러 모으고

구름은 기꺼이 하루의 마지막 한때를

내 가벼워진 이마 위에 내려놓고 지나갔다

언제나 나는 그 보리밭 끝에 남겨졌지만

해 질 무렵 잠깐씩 잔잔해지는 저녁 물살을 바라보며

생애의 마지막 하루처럼 평화로웠다

쓸쓸한 시절은

진실로 혼자일 땐 동행하지 않는 법이었다

바람의 길을 따라 보리밭이 저희의 몸매를 만들 때

나는 길 끝에 서서 휘파람 뒤에 새겨진 길을

천천히 따라가거나 물소리보다 먼

세월을 바라보았을 뿐

거기선 오히려 아무것도 그립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사람으로 느리게 저물어서

비로소 내 눈물은 스스로 따스한 뉘우침이 되고

물소리는 점점 더 잔잔한 평화가 되고

서쪽으로 불어가는 생각들과 함께 나는

노을보다 깊어진 눈시울로 길 끝에 서서

아직 잊혀지지 않은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생애의 마지막 하루처럼

두물머리 보리밭 끝에 날이 저물 때

멀리 가는 물소리와 함께

어디로든 한꺼번에 저물고 싶었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았다

- 류근,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카페 '아름다운 시마을'>

제목 작성자 조회수 작성일
중복글 관련 안내드립니다(2019.07.01)  (5)
[필독] 저작권 관련 게시글 삭제 처리 기준 (2017.02.15 링크 추가)  (28)
좋은글 게시판 이용안내  (18)
가을 그리움  file 모바일등록 new 블루아이스 35 10:53:51
알렉산더 왕의 초상화   new 뚜르 34 08:40:52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new 뚜르 21 08:40:46
진실한 마음을 주는 사람   new (1) 직은섬 66 06:46:44
하트해수욕장에서/김용호   new (1) 김용호 39 02:59:17
쓸쓸한 고백 / 손수진  file (1) 뚜르 143 23.09.25
‘스마일 점퍼’ 우상혁이 웃는 까닭은?   (1) 뚜르 96 23.09.25
♡행복은 사소한 곳에. 숨어 있다♡밴드에서   모바일등록 (1) 백두산 126 23.09.25
천숙녀의 [등(燈)]  file 모바일등록 (2) k남대천 164 23.09.24
9월의 장미   (2) 도토리 126 23.09.24
아침햇살에게   (1) 도토리 106 23.09.24
행복 찾기   (2) 도토리 126 23.09.24
꽃무릇 /이정원  file (1) 뚜르 136 23.09.24
사랑하는 법   (1) 뚜르 168 23.09.24
♡ 내 안에 살고 있는 너  file (2) 청암 163 23.09.24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간다는 건   (1) 직은섬 149 23.09.24
인생은 구름과 바람과 비   (1) 직은섬 163 23.09.23
♡因.,,,,,,緣♡모셔온 글   모바일등록 (3) 백두산 172 23.09.23
당신과 함께해요^^♡   모바일등록 (1) 77현정 161 23.09.23
어떠한 일도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2) 뚜르 180 23.09.23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