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촉하다 - 이규리
뚜르 2023.05.07 09: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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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촉하다 - 이규리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도 있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서랍 속에 접어 둔 언니의 봉긋한 브래지어는 내가 꿈꾼 조숙하고 달콤한 흥분이었다. 겨우 밤톨만한 젖멍울이 생겼을 뿐인 내 가슴을 단숨에 수식했던 브래지어의 황홀을, 밤마다 나는 재촉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저 브래지어의 우듬지에 닿기를, 분홍빛 유두가 살며시 끝을 향해 긴장해 있기를, 그러나 재촉했던 지식, 재촉했던 사랑처럼 내 가슴은 그리 빨리 부풀지 않았고 언니의 에로틱한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큼 나는 일찍부터 공허 같은 걸 품고 다닌 게 아닐까.

어디를 휘돌아 나왔는지 언덕과 낭떠러지를 가졌던 내 안의 길에서 밀어 올렸던 꽃대,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렸다. 아직도 재촉할 희망이 있는가.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 더욱 비어 있고 이제 우듬지에 닿았던 유두가 조금씩 빈틈을 가지지만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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