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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기 직전에야 함께 있음을 알았다 /박은정
100 뚜르 2021.09.27 08: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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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기 직전에야 함께 있음을 알았다  /박은정


소란스런 꿈에서 달아난 밤에는
태풍에 떨어진 낙과처럼 자신의 모습을
개 짖는 소리에 묻어버리고 싶었네

뜬눈의 소음들이 난무하는
목소리, 그 지겨운 목소리들

부엌에는 추리소설을 읽는 선한 눈동자가
안방에는 스모 경기를 보는 중년의 입술이 있어
헐벗은 마음을 가두고도 사료 주지 않는
소녀의 뒤꿈치가 절름거리고

이 축축한 세계에선 누구도 멀리 가지 못하네

목책 아래 가시풀이 바람을 휘감고
침묵 속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지평선 되어
마른눈으로 대기를 감싸는 손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필연조차
우연으로 가장하고 우연의 무력함으로
나는 사람처럼 살아가려 하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애매한 용서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늙고 병약한 피아니스트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건반을 누르던 밤

패배보다 멋진 절망 속에서
손 하나를 내밀면 마음 하나가 꺾이는
한숨이 있고 그 한숨 속에서
몸을 축이는 노인의 알약 같은 안온함

죽은 노인을 둘러앉은 유령들이
코를 막고 다음은 누구 차례일지 가늠해보는
그런 짜고 막막한 여름이 있었던가

곤두선 머리카락이 빗줄기에 젖어
어제의 미움도 함께 녹아내리던 날들

백 번을 헤어지자고 다짐했지만
다음 날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여자와
테라야마 슈지의 책을 책장에 꽂을 때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을
어쩔 줄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잠든 천사의 깃털을 주우려고
시린 손가락에 입김을 불던 믿음과
간밤의 이불 속에서 덩굴처럼 자라나는
의구심이 두 눈을 가릴 때까지

이 고독한 전쟁 속에서
밤은 누구의 편도 아닌 조악한 신을 향해

엎드려 눈 감고
소리 없는 비명 속에서
도시를 건너 도시의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사라지는 이야기라면

우리의 죄를 묻지 않는 물고기들
어제의 슬픔을 나무라지 않는
나무들
바람들
절벽들

그런데 우리가 함께 본 것은 무엇인가

물음표를 던지면
도미노처럼 눈을 감는


ㅡ 『현대시』(2021,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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