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해 시 모음 20편/그도세상
그도세상김용호 2020.03.21 00:37:23
조회 299 댓글 0 신고
문성해 시 모음 20편
☆★☆★☆★☆★☆★☆★☆★☆★☆★☆★☆★☆★
《1》
검색 공화국

문성해

도서실 컴퓨터실에
붙박이로 앉은 사람들
젊어서 천천히 찌그러지고 있는 사람이나
늙어 한꺼번에 찌그러진 사람이나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웃거나 한숨을 쉬거나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지독한 모니터와의 사랑이다
제가 궁금하면 검색해 보세요
그 남자는 여유 있게 말했다
나는 쿠키를 오븐 없이 굽는 방법을 검색하며
쿠키도 프라이팬에 구울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컴퓨터실이 떠나가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모두들 천기를 누설 받는 결연한 표정들이기에 관두기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게 하는 법과
물속에서 물고기랑 오래 대화하는 법을 내리 검색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훔쳐본 옆 사람의 모니터에서
깨알 같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고
화장실 앞에서는 한 남자가 핸드폰으로
아내의 잔소리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오후 여섯시, 사서들은 더욱 길게 늘어진 얼굴로
부은 발목을 주섬주섬 구두 속에 꽂아 넣는다
이용객 여러분, 오늘의 검색 놀이는 이만 끝입니다
도서실 퇴장을 알리는 노래가 나오면
의자에 눌러 붙은 살을 우두둑, 떼어내고 일어서는 사람들
속수무책의 손가락을 덜렁거리며
우울한 침팬지들이 쏟아져 나온
오후 여섯시 이후의 거리는
묻지 마 관광버스처럼 털털거리고
도무지 검색이 안 되는 너는
모호한 이 저녁은
실로 두렵기까지 하고
☆★☆★☆★☆★☆★☆★☆★☆★☆★☆★☆★☆★
《2》
국화 차를 달이며

문성해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
새를 마시고
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긴 장마 속에
국화가 흘리는 빗물을 다 받아 모시는 땅처럼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처럼
텅텅 울리는 긴 복도처럼
고요하고도 깊은 가슴이니
☆★☆★☆★☆★☆★☆★☆★☆★☆★☆★☆★☆★
《3》
귀로 듣는 눈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 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
《4》
그러했으면

문성해

날아가는 오리떼가 슬쩍 행렬을 바꾸어 가듯이
내가 너를 떠올림도 그러했으면

오리가 슬쩍 끼어든 놈에게 뭐라고 타박을 하듯이
내가 너를 탓함도 그러했으면

날아가는 오리 빨간 발이 깃털 속에서 나란하듯이
우리가 서로를 바라봄도 그러했으면

날아가는 오리떼가 한순간 휙 방향을 바꿀 때
마지막 한 놈도 그 꼬리를 놓치지 않듯이
내가 너를 마냥 떠올림도 그러했으면

높고 멀리 날아가는 오리떼가 그냥 정처 없음이 아닌 것처럼
내 그리움의 산정에서 동그마니 네가 기다려줌도 그러했으면
☆★☆★☆★☆★☆★☆★☆★☆★☆★☆★☆★☆★
《5》
나의 거룩

문성해

이 다섯 평의 방안에서 콧 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대며 자는 어린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 속으로 쐐애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 날 듯 바닥 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과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세탁 집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유행가로 들리는 것도 신기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 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
☆★☆★☆★☆★☆★☆★☆★☆★☆★☆★☆★☆★
《6》
나의 거룩

문성해

이 다섯 평의 방안에서 콧 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대며 자는 어린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 속으로 쐐애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 날 듯 바닥 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과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세탁 집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유행가로 들리는 것도 신기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 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
☆★☆★☆★☆★☆★☆★☆★☆★☆★☆★☆★☆★
《7》
모란 해후

문성해

모란이 핀 것을 네해 만에 본다
모란은 몰래 옛 애인 창문 앞을 서성거리다 가는
모가지가 수긋한 여자 같아서
인기척에 벌컥 열어 젖히는 창문보다 먼저 떨어진다

모란은 화가 많아서
제 화를 다스릴 줄 모르는 여자의
아궁이 앞에 발갛게 비치는 볼 살 같아서
연기가 채 삭기도 전에 치마끈을 올리고 사라지고 만다

모란을 한 장 한 장 벗기면
연기 한 토막을 들고 섰는 듯
몰려오는 낭패감이여

모란이 피어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모란은
연못 앞에 벗어놓은 붉은 신발 같아서
가슴에 인주를 문지르는 손바닥 같아서

모란을 보고 나면
눈 깜짝할 새 네 해가 또 가버릴 것 같아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인 양
이리도 안쓰럽게 반가워지는 것이다
☆★☆★☆★☆★☆★☆★☆★☆★☆★☆★☆★☆★
《8》
물의 종족

문성해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불러본다
물고기 베고니아 버드나무 여름 들판의 옥수수들
그리고 삼 년 전 태안 바닷가에서 주워온 몽돌 한 개
그것은 물만 주면 반들반들한 정수리를 내게 보여주곤 했지
옛날 옛적 담뱃내 쩐 누런 방에서 죽은 외할머니도
사흘간 물만으로 사시다가 호르륵 날아가 버리셨지
혹서기의 뱁새처럼

나도 가끔은 물만으로 살고 싶은 저녁이 있네
물가에 앉아 물가가 주는 노래
물가가 주는 반짝거림만으로 환희에 찰 때
그건 물로만 살게 될 나의 마지막을 미리 체험하는 순간,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것들
최후를 사는 것들
느린 보행의 늙은 사마귀
늦여름 오후의 백일홍
저녁이 오기 전 저수지 위에서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것들

눈앞의 숲을 자신이 가진 가장 부드러운 움직임들로 마음껏 장식하고는
맑은 물 한 컵을 마주한 요정의 저녁처럼
한가로운 생의 조율이 끝나면
물이 밀려가듯 한 세계가 닫힌다
☆★☆★☆★☆★☆★☆★☆★☆★☆★☆★☆★☆★
《9》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 듯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산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 밥 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으깨지고 바숴진 음식 냄새가 공중에서 섞여야
그제야 후끈 달아오르는가
왜 단도직입이 없고 워밍업이 필요한가
오늘은 내가 밥공기를 박박 긁으며 네게 말한다
언제 한번 또 밥이나 먹자고
☆★☆★☆★☆★☆★☆★☆★☆★☆★☆★☆★☆★
《10》
백주 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문성해

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
《11》
벤치

문성해

나는 앉아 있었죠
더럽고 낡은 벤치 위에

벤치는 잠깐 머무는 곳
집이 아니므로
나는 어제의 누군가처럼 잠시 앉아
멍하니 호숫가 백조들을 바라보았죠

호수는 이 공원의 가장 깊은 악보
백조는 이 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었으므로

나는 내일 도착할 우편물과
부랑자 시설에서 죽은 고모와
오랜 세월 이 공원에 오지 않았던 날들도 생각했죠

그리고 어느 해 겨울
부랑자 하나 서표처럼 꽂혀 있던 이곳과
그의 두꺼운 외투와 내용을 알 수 없는 보퉁이들도

그리고는 읽어 내려갔죠
그 해 겨울 이곳의 주인이고 살림이고 체온이었던 그를
오래 펼쳐진 채 잠과 침과 얼룩으로 두툼해진
그의 페이지들을

악보도 선율도 어둠 속으로 스러지면
읽히지 않으려 서둘러 떠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들었죠
조용히 나의 한 페이지가 넘겨지는 소리를

오래된 공원에
두툼한 우편번호 책처럼 펼쳐진 벤치가 있죠
아주 가끔씩 독서광인 나비가 앉았다 가죠
☆★☆★☆★☆★☆★☆★☆★☆★☆★☆★☆★☆★
《12》
봄 밤

문성해

빈 집 앞에서 쓴다.
젖빛 할로겐 등을 켜 단 목련에 대하여,
창살 박힌 담장에 하얗게 질려 있다고,
응큼한 달빛이 꽃잎 벌리려 애쓴다고,
나뭇가지를 친친 감은 가로등이 지글지글 끓는다고,
촛농처럼 떨어진 꽃잎들 창살에 꽂힌다고,
봉오리들 아우성치며 위로위로 도망친다고,
추억의 등불 켜 다는 마음 약한 꽃들이
나 같다고.
☆★☆★☆★☆★☆★☆★☆★☆★☆★☆★☆★☆★
《13》
빛나는 담

문성해

양지 바른 공원 담 밑
노인들이 앉아 있다
묵묵히 해바라기 하는 담장 밑으로
공원 속 햇살들 다 모여 있다

가만,
잔뜩 보풀 인 스웨터 속 저 몸들은 지금 분해되고 있는
거나 아닌가
겨우내 바짝 쪼그라든 살갗 틈새로 햇살이 비비고 들
어가서는
마침내 살비듬을 부스러뜨리고 떼내어서
지금 어디로든 흘려보내고 있는 거나 아닌가
검버섯 돋은 자리들은 흘러가다 흘러가다
홀로 핀 제비꽃 그림자로 보태어지는 거나 아닌가
조금씩 사라지는 육신의 자리에
어느새 햇살이 소복하니 앉아 있는 거나 아닌가
멀리서 살비듬이 어른거리는 풍경 보고
우리는 봄이 오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거나 아닌가
이상하게 봄 속에는 흙내가 난다고
멀쩡한 콧속 후비고 있는 거나 아닌가

한나절 지나자
무료급식소로 이승의 한끼 때우려 일어서는 노인들 따라
빛나던 담벼락도 금세 저무는 거나 아닌가
☆★☆★☆★☆★☆★☆★☆★☆★☆★☆★☆★☆★
《14》
울음 나무 아래를 지나다

문성해

매미 울음 아래를
자전거로 지나는데
울음의 밑은
참 서늘하군요

흔치 않아요 이렇게
울음의 축축한 지붕 밑을 지나는 일은,
거대한 목청 아래를
뚫고 달리는 일은,

한때 목련꽃이 환했던 이 나무
그 때의 꽃들도
다 한 떼의 울음이었죠

울음이 차있던
나무의 그늘은
유독 짙죠

혼자 선잠에서 깨어나
길게 길게 울던
홑 여덟 살의 마루

마당을
무릎으로 기어가던 어스름이
듣던 내 울음도 이랬을까요
그래서 돌아보고 돌아보고는 했던 걸까요
☆★☆★☆★☆★☆★☆★☆★☆★☆★☆★☆★☆★
《15》
이번에는 목련이다

문성해

이제부터는 흰빛이다
이제껏 세상의 우글거리는 빛들을 따라
대처를 떠돌았으니
나는 내 남은 빛을 목련에게 쏘련다
일요일이면 교회도 다녀보고 절에도 기웃거려 봤으니
이번에는 목련교도이다
대처로만 떠돌다 늙은 화공의 붓 하나가
쿡쿡 목련을 찍어놓은 이 대낮
나는 일장춘몽을 쫓느니
훤칠한 키의 저 목련랑이나 사랑하리라
왜 봉우리들은 옆구리가 굽었는지
그 빛은 왜 채색을 기다리는 도화지 빛인지
왜 저 아낙은 냉이를 캐도 꼭 목련 그늘 아래서만 캐는지
그건 당신만 보면
내 허리가 굽어져 자꾸만 웃는 이유 같은 것
그건 자꾸 관심이 가고 또 관심 받고 싶다는 것
이유 없이 좋다는 것
날이 갈수록 벗겨지고 벌어지는 당신 가르마를 보듯
오늘은 꽃잎 떡떡 벌어지는 목련의 상부를 내려다보며
저 안간힘의 흰빛을 내 눈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 두려한다
거뭇한 슬픔 앞에 켜들
한 해 흰빛의 양식을
☆★☆★☆★☆★☆★☆★☆★☆★☆★☆★☆★☆★
《16》
조그만 예의

문성해

새벽에 깨어 찐 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한다

이 빨갛고 뾰족한 끝이 먼 어둠을 뚫고 횡단한 드릴이었다고
그 끝에 그만이 켤 수 있는 오 촉의 등이 있다고
이 팍팍하고 하얀 살이
검은 흙을 밀어내며 일군 누군가의 평생 살림이었다고

이것을 캐낸 자리의 깊은 우묵함과
뻥 뚫린 가슴과
술렁거리며 그 자리로 흘러내릴 흙들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대책 없이 땅만 파내려가던 붉은 옹고집을
단숨에 불과 열로 익혀내는 건
어쩐지 좀 너무하다고

그래서 이것은
가슴을 퍽퍽 치고 먹어야 하는 게 조그만 예의라고
☆★☆★☆★☆★☆★☆★☆★☆★☆★☆★☆★☆★
《17》
첫사랑

문성해

마당에서 비눗물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애의 퉁퉁 불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점심 전이었고 삼촌 방에선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담장 밖 돼지우리에선 산달을 앞둔 커다란 몸이 뒤척이는 소리
아무래도 흘러나오는 것들이 유독 많았던 그 날
내 몸에서 비릿한 초경과 함께 울음이 흘러나왔고
학교에서 나를 데리고 온 그애 곁에서 문득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고 있었고
이북 방송을 다시 듣기 시작한 삼촌이 먼 길가는 기러기들
행렬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막내 동생처럼 조용했지만
내 안의 피가 몽땅 흘러나가고 남 모를 피로 조용히 바꾸어진 그 날 저녁
나는 기르던 토끼를 태연히 식구들과 둘러앉아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핏빛 같은 노을이 떠내려가는 수챗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그 날부터 였을거다
내 몸이 둥싯 둥싯 보름달처럼 부풀기 시작했던 것은
☆★☆★☆★☆★☆★☆★☆★☆★☆★☆★☆★☆★
《18》
한 수 배우다

문성해

매미가 아파트 방충망에 붙어 있다

내가 시 한 줄 건지지 못해
겹겹이 짜증을 부릴 때조차
매미는 무려 다섯 시간이나
갓 태어난 날개며 평생 입고 다닐 몸이며
울음이며를 말리우고 있다

내가 소리내어 울고 싶을 때조차
그저 조용히 울음을 견디고 있다

내가 안 나오는 시를 성급히 애 끓이는 사이
매미는 그저 조용히 제가 지닌 것들을
미동도 없이 말리우고 있다가

드디어 해가 지기 시작한 즈음
조용히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로 울음을 끓이더니
하마 날아가고 없는 거였다
☆★☆★☆★☆★☆★☆★☆★☆★☆★☆★☆★☆★
《19》
해바라기

문성해

하늘 아래
어깨 구부정한 큰 바위 얼굴의 내 사내 같고
암놈 빼앗긴 숫사자의 실연한 얼굴 같고
누군가의 실수로 잘못 태어난 프랑켄슈타인 같고

구멍 숭숭 뚫린
스펀지 같은 상실감이 하나
허공에 걸려 있다
☆★☆★☆★☆★☆★☆★☆★☆★☆★☆★☆★☆★
《20》
Y의 이불

문성해

반지하방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가면
삐걱이는 침대 위에
그것은 펼쳐져 있습니다
한번도 각을 만들어 본 적 없는 그것에겐
시큼한 물비린내가 납니다

호수와 뭍의 경계에서
신발을 벗는 자와도 같이
당신은 그 속으로
옷을 입은 채 뛰어듭니다
어린 날 냇가에서처럼

당신은 그 속에서 아득히 눈을 감습니다
잠의 치어들이 닫힌 눈꺼풀을 톡톡 건드릴 수 있게,
간혹 이불 밖으로 발을 차는 것은
잠 속에서도 당신이 줄기차게 헤엄을 친다는 증거

그 속에서 당신은
늙어가는 허파 대신
옆구리에 푸른 아가미가 패입니다
따뜻한 돌멩이들이 손바닥을 데워주던 시절처럼

하지정맥류의 종아리를 절뚝이며
만년 알바생인 당신은 또 나섭니다
지느러미 돋은 달과 함께
24시 편의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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