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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불효자의 눈물
12 좋은말 2004.02.16 10: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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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만에 귀국한 재독 철학자 송두율(宋斗律) 교수가 지난 일요일 남양주 천주교 묘지에 있는 선영을 찾았다. 아버지 산소 앞에서 눈물짓는 송교수의 모습은 여러차례 북한을 드나들었던 ‘로동당’ 당원의 얼굴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반독재 투쟁의 길을 걸었던 ‘친북 지식인’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못다한 효도를 참회하는 한 나약한 ‘불효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묘소에 술잔을 올리기에 앞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도한 9월29일자 경향신문은 “아버지… 불효자가 왔습니다”라는 사진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이승을 뜬 부모 앞에선 아무리 훌륭한 자식도 한낱 죄인이자 불효자일 수밖에 없지만 37년동안이나 부모를 찾지 못했던 송교수의 회한은 어느 누구보다도 컸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었던 처지였기에 아버지 묘소에 술잔을 올리는 송교수의 감회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올랐던 20대 청년이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어 아버지 산소를 찾았으니 그 회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가정의 부자관계는 대체로 ‘가깝고도 먼 관계’였다. 자식에 대한 공개적인 애정표현을 금기로 여겼던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 아래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소 닭보듯 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자간의 의사소통도 어머니를 통해서 오가는 경우가 많다.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껄끄러운 부자관계는 아들이 가장이 된 뒤에도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 부자가 한 자리에서 집안 대소사를 의논할 때도 얼굴을 마주보며 오순도순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서로 시선을 피하며 제3자에게 얘기하듯 짧게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때때로 경원(敬遠)의 대상을 넘어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신경림(申庚林) 시인이 쓴 ‘아버지의 그늘’에 그려진 아버지상(像)이 그런 아버지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채 술국을 끓이고/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중략)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날 거울을 보다가 나는 간 데 없고 늙고 초라한 아버지가 서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제대로 기 한번 못펴고 큰소리 한번 못친 늙고 초라한 아버지가 거울 속에 서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신경림 시인이 그린 아버지상은 몇몇 특수한 경우에 속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바깥으로만 떠도는 ‘가깝고도 먼’ 존재였던 것이 우리 윗세대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평균적인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유행가 가사에 어머니를 그리는 내용은 있어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아들들이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깨닫는 것은 대부분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거나 아니면 뒤늦게 아버지의 산소 앞에 무릎 꿇고 술잔을 올릴 때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언젠가 “나는 정의를 사랑하지만 그 정의가 내 어머니에게 총구를 겨누면 나는 어머니편에 설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부모와 자식간에 맺어진 혈육의 끈은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교의(敎義)보다도 강하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송두율 교수는 아버지 산소 앞에 술잔을 올리면서 그동안 자신이 섬기고 이룩한 이념이나 성취가 37년동안 아버지를 찾지 못했던 불효를 보상하기엔 너무나 미흡하고 부족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버지 산소 앞에서 눈물짓는 송교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한번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성취보다도 앞서는 부모 자식간의 끈끈한 혈육의 정을 새삼 깨닫게 된다.

- <경향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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