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기상 조건에도 봄바람은 견딜 만하고 가을 바람은 더 추운 느낌이다. 거리를 혼자 걸어도 봄에는 별로 우울한 기분이 들지 않지만 가을엔 왜 그렇게 처량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자연의 변화 앞에서 밝고 생동하는 느낌이 들기는 쉽지 않으나 그렇다고 자꾸 나이 먹는 일,돌이킬 수 없는 것,희망 없음에 관한 것들만 생각한다면 남아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연초에 멋진 계획을 세우던 사람도 이맘때가 되면 그다지 의욕적이지 못하다. 왜? ‘이미 다 지났는데 뭐. 남은 동안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조금 다른 예이지만 얼마 전 원조교제에 가담해온 10대 소녀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본 일이 있다. 그 소녀는 “갈 수만 있다면 이런 일 모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그릇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온전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예단하는 느낌이다. 이제 겨우 10대의 나이에 말이다．

우리네 일상에서 비슷한 심리 상태를 경험하는 일은 잦은 것 같다. 비만해진 몸을 보며 자포자기 심정으로 더욱 식탐을 하는 사람이 그러하다. ‘이 나이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하며 오래 된 꿈을 접고 마는 사람 또한 그렇다. ‘내가 몇 년만 젊었어도 어찌어찌할 텐데’ 하며 겨우 5년,10년 과거를 안타깝게 그리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보지 않던가. 하물며 그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나 더 높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른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퍽 드문 일이리라．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의 첫 번째 날입니다)’ 기막히게 좋은 말이 아닐 수 없다. 맞는 말이지 않은가? 오늘이야말로 남은 생의 시작이 되는 날이라는 이 말이…

나 역시 30고개를 넘고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관해 제한을 두었다. 이건 20대에 하는 일이니까 너무 늦었지,이제 해서 언제 써먹어,이 운동 배웠다간 어디가 부러질거야. 이건 이래서 늦고,저건 저래서 안 되고 등등 온갖 핑계를 늘어놓아 스스로의 가능성을 턱없이 좁혀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익숙한 것,편리한 것,실수 안 할 일에만 골몰하니 우물안 개구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늦은 것은 없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것,오늘이 남은 인생을 출발하는 시작이 되는 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못할 것이 없고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상강(霜降)인 오늘,이 말이 더욱 와 닿는 것은 찬서리 맞고 죽은 듯 메말랐던 초목도 새 봄이 오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 역시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사실은 더 큰 에너지를 씨앗처럼 품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까닭이다．

- 이익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