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캅스] - 성관계 동영상 유출 문제에 무감각했던 우리가 만든 괴물
감독 : 정다원
주연 : 라미란, 이성경
뭐, '걸복동'이라고???
'1UBD'라는 은어를 통해 조롱거리로 전락한 [자전차왕 엄복동]을 보고 나니 이번엔 [걸캅스]가 궁금해졌다. [걸캅스]는 일부 네티즌들이 '걸복동'이라고 부르는 영화로, '걸복동'은 '걸캅스 + 엄복동'의 합성어이다. 결국 이는 [걸캅스]가 [자전차왕 엄복동]에 이어서 조롱거리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솔직히 '걸복동'이라는 조롱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영화가 개봉한 후, 영화를 직접 본 관객에 의해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걸캅스]는 개봉도 하기 전에 조롱거리가 된 것이기에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걸캅스]가 정말 '걸복동'인지, 아니면 '걸복동'이라 부르는 일부 네티즌들에게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인지, 판단을 하려면 먼저 영화를 봐야 한다. 결국 남들이 '걸복동'이라 부르든지 말든지, 영화에 대한 내 스스로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니까. 그러한 까닭에 [걸캅스]가 개봉한 지난 목요일, 나는 [걸캅스]를 보기 위해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겠다. [걸캅스]는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이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버닝썬'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영화의 소재 자체가 시의적절하고, 라미란, 이성경 콤비도 예상외로 잘 어울렸다. 여기에 최수영, 윤상현, 엄혜란 등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스토리 전개의 짜임새가 조금 헐겁긴 하지만, 눈 감아 넘어가 줄만하다. 결국 내 판단은 [걸캅스]에 대한 '걸복동'이라는 조롱은 과한 것이라는 점이다. 글쎄 '걸복동'이라는 조롱을 퍼트린 사람의 의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뒤바뀐 남편과 아내의 역할
[걸캅스]는 1990년대, 여자 형사 기동대 소속의 형사 박미영(라미란)의 활약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과격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범인을 검거하는 미영. 그리고 그 모습에 반한 사법고시생 조지철(윤상현)의 모습이 이어진다. 시간이 흘러 미영과 지철은 결혼을 했고, 두 사이에 아들까지 태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지철은 고시생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고, 미영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경찰을 그만두고 민원실에서 근무하는 신세가 된다.
나는 이 설정이 굉장히 절묘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백수 신세인 지철을 무시하는 미영과 지철의 여동생 조지혜(이성경)가 나온다. 지철의 면전에 대고 익숙한 듯 욕을 하는 두 사람. 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지철은 여기에 아무런 항변을 할 수가 없다. 원래가 그렇다. 가족 관계에서 경계적 능력은 권력을 상징한다. 우리나라가 가부장적 사회였던 이유는 지금까지 경제적 능력이 남편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직장을 다니는 아내가 늘어나면서 아내도 경제적 능력을 가지게 됐다. 당연히 예전과 같은 가부장적 사회가 통하지 않는다. [걸캅스]는 가부장적 남편과 무시당하는 아내라는 기존의 설정을 역전시킴으로써 IMF 이후 바뀐 우리 사회를 풍자한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것은 같다. 집에선 큰소리 떵떵 치던 미영은 직장에선 상사 눈치 보며 정리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온갖 아부를 해댄다. 사정은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집에선 오빠를 무시하며 올케인 미영에게 맞서지만, 직장에선 사고뭉치 막내로 온갖 구박을 다 당한다. 미영과 지혜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어도 크게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걸캅스]의 설정이 내게 자연스럽게 느껴진 이유이다.
성관계 동영상 유출 문제에 무감각했던 우리가 만든 괴물
시누이, 올케 관계인 미영과 지혜는 서로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20대 여성 민원인이 미영과 지혜 앞에서 차도에 뛰어들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녀가 자살을 시도한 이유는 성관계 동영상 유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성관계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출되기 전에 어떻게든 막으려는 미영과 지혜. 하지만 다른 경찰들은 이 사건에 관심이 없다. 다른 중요한 사건도 많은데 실적에 도움이 안 되는 그깟 성관계 동영상 유출 사건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버닝썬'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 역시도 이 영화의 소재가 너무 자극적일 뿐,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성관계 동영상은 남녀가 서로 좋아 합의하에 찍은 것이기에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몰카 범죄라고 해도 그걸 엄청난 범죄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안일한 인식이 '버닝썬' 문제로 번진 것이다. '버닝썬'의 그들은 여성의 술에 약을 타서 의식을 잃게 만든 후 집단 강간을 저질렀고, 그 동영상을 서로 돌려보며 피해자 여성을 조롱했다. 그것에 대해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성관계 동영상 유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한 문제의식이 그런 괴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미영과 지혜는 민원실에 근무하는 천재적인 해커 양장미(최수영)의 도움을 받아 우준(위하준) 일당을 추격한다. 그들은 신종 마약을 만들어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의 의식을 잃게 만들고, 의식을 잃은 여성들을 집단 강간한 후 포르노 사이트에 공개하고, 성관계 동영상을 보기 위해 포르노 사이트에 회원 가입한 남성들에게 신종 마약을 팔며 돈을 벌었다. 성관계 동영상 유출이라는 사건의 이면엔 이렇게 더 큰 추악한 범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걸캅스]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잡아냈기 때문이다. 미영과 지혜 그리고 장미는 피해 여성의 성관계 동영상 유출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오히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다며 면박을 주고, 업무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며 징계를 내린다. 그러나 그녀들이 하는 일은 결코 쓸데없는 짓거리가 아니다. 한 여성의 생명과 직결된 것이며,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암처럼 우리 사회를 파고드는 신종 마약 조직을 파헤치는 일이다. (나는 '버닝썬' 사건 이전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 국가인 줄 알았다.)
[걸캅스]의 현실적인 설정이 놀라웠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정다원 감독은 그 어떤 르포 기사보다 현실감 있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어냈고, [걸캅스]를 보며 어쩌면 실제 저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미영과 지혜가 우준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장면에서는 짜릿한 쾌감도 느껴졌다. 물론 그녀들만의 힘이 아니다. 그동안 나 몰라라 했던 지혜의 형사 팀과 민원실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루어낸 성과이다. 결국 [걸캅스]에서 제기한 모든 문제는 몇몇의 영웅의 활약이 아닌, 우리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힘을 합쳐야만 해결할 수 있음을 정다원 감독은 외치고 있다.
[걸캅스]를 본 후 나는 성관계 동영상 유출 문제에 대해 무감각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그리고 피해 여성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이렇게 나를 반성하고 부꾸럽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걸캅스]는 분명 성공한 영화이다.
오락 영화의 기본에 충실하다.
성관계 동영상 유출 사건이라는 [걸캅스]의 소재는 자극적이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인 소재를 영화는 과하지 않게 풀어나간다. 결국 이 영화의 초점은 성관계 동영상이 아닌, 그것을 유출시키는 추악한 범죄자들에게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조금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영화의 분위기를 의식적으로 가볍게 풀어나간다. 장미가 마치 춤을 추듯이 마구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지만 최상의 결과를 유출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애초에 [걸캅스]는 치밀한 스릴러와는 거리가 먼 코미디 영화를 표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다. 영화를 보며 나는 몇 번이고 맘껏 웃었으니까...
물론 [걸캅스]에도 단점은 있다. 특히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우준 일당이 미영, 지혜, 지철을 죽이지 않고 묶어놓은 채 건물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아쉬운 이유는 너무 억지스럽기 때문이다. 지혜가 경찰임을 알면서도 그녀를 납치해서 죽이려 했을 정도로 대담한 성격의 우준이라면 그들을 살해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야만 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심각한 캐릭터는 우준이다.) 하지만 우준은 그들을 묶고 건물을 불을 지른 것으로 만족한다. 그래놓고 영화 후반부에 '어떻게 빠져나왔어?"라고 묻는다. 진정 궁금한 것은 왜 악당들은 항상 주인공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 그러지 않고 빠져나올 틈을 주는 것일까?
이런 몇몇 사소한 문제들이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분명 [걸캅스]는 오락 영화의 기본에 충실한, 최소한 내겐 재미있는 영화였다. 만약 이 영화가 [투캅스], [조선 명탐정] 시리즈처럼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나는 분명 극장으로 향할 것이다. 이번엔 라미란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말이다. (아내는 자신도 [걸캅스] 보고 싶었는데 나 혼자 봤다며 섭섭해했다.) 우리 부디 다시 만나자, '걸캅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