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견례를 앞두고 있었을때 갑작스런 사고로 목숨을 걸고 큰 수술을 하신 우리부모님. 눈물로 며칠을 지새우고 있었던 나를 불러내어 넌 이별을 고했지. 나의 싫은점들을 나열하며 당분간은 여자생각없이 일에만 전념할거라고.

바보같이 난 우리 사이가 피부에 생긴 상처 같은거라 생각했었어. 지금은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듯 우리사이도 그렇게 되리라고 굳게 믿었어. 하지만 다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처는 사실 깊숙한 곳에서부터 곪아 있었던거였나봐. 그래서 나을듯 나을듯 낫지 않았나봐.

난 한결같이 우리 인연을 우리가 쌓아왔던 시간을 그리고 널 믿었지. 다시 돌아올거라고. 헤어진지 얼마되지 않아 어떤 여자와 함께있는 너를 주변사람들이 자주 마주치긴 했지만 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채로 너와의 재회를 꿈꿨어. 병간호를 하다가 가끔 마음이 힘들때마다 재회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즐겨찾기를 해놓고 몇번이고 반복해 읽곤 했어.

그런데 반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만삭이 된 여자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너를 친구들이 본거야. 적어도 우리의 헤어짐 그 후에 시작한 사랑일꺼라고 믿고 싶었지만 모든 앞뒤 정황들이 그게 아님을 가르키고 있었고 죽을만큼 힘들더라.결혼하자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나를 언제까지나 지켜주겠다고 말하던 그 입술로 그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는걸. . . . .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너의 그 눈은 언제부터 다른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정말 나는 죽을만큼 힘든데 목구멍으로 물한모금 넘기는것조차 힘든데 심장이 찢길듯이 아픈데 죽을것 같은데 그렇다고 죽지는 않는다는 걸, 이 느낌을 언제까지 계속 맛봐야 되는지 눈앞이 깜깜했어. 좋았던 기억마저 시궁창에 처넣어 버리고 싶을정도로 하나하나 밝혀지는 너의 거짓말 덕분에 몸서리칠정도의 배신감에 하루하루 수백번도 반복되는 감정기복에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어.

그러던 어느날 너의 부모님을 만났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지나가려는 나를 붙잡으시더라. 이야기 좀 하자고. 주변사람들을 통해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으셨어. 나와 헤어지기 훨씬 전부터 너와 같은곳에서 일하는 한 여자애 얘기를 자주 해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으셨대 . 혼인신고도 이미 했고 결혼식도 그 여자가 몸좀 추스리고 상황봐서 할꺼라고. 바람이어도 니가 나한테 마음이 떠나서 그런걸 뭘 어쩌겠냐며 이왕 이렇게 됐으니 너의 행복을 빌어주라고 하시더라. 니가 성공하길 멀리서 기도하고 언제까지나 지켜봐달래. 너도 니가 사랑했던 남자가 성공하면 얼마나 뿌듯하겠냐며. 그리고 신신당부하시더라. 너의 모든 행동들을 우리가족들에게도 내 주변인들에게도 얘기하지말고 조용히 덮어달라고. 난 웃었어 웃음밖에 안 나더라. 그리고 돈봉투를 주셨지. 난 아무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테이블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 나왔어. 그리고 걸었어. 걷고 또 걸었어. 걸어서 1시간이 넘는거리를 주위사람들의 시선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엉엉 울며 걸었어. 너희 둘은 행복해 죽을정도로 잘 사는데 내 첫사랑의 끝은 왜이리 비참해야 되는걸까?

너의 가면은 쉽게 들키지 않겠지. 오랜시간 사귀어 온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이미지 관리에 목숨거는 넌 죽을때까지 연기할지도 몰라. 성실하고 책임감있고 노력파의 예의바른 남자를

언제부터인가 깨닫치 못한사이에 멍하니 몇시간이고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는 버릇이 생겼어. 잠을 잘 못자. 기계처럼 매일같이 정해진 일과를 반복하지만 이 버릇과 불면증만은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