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같은 길 동무 / 이해인

       연못 물 속에서 진흙 속에서

       깨끗이 피어나는 연못의 마음

       연꽃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

       깨끗하자 깨끗하자 우리의 창경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잊

       지 않고 곧잘 흥얼거려 보는 교가이다.

       나와함께 이 노래를 불렀던 수많은 아이들이,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겨울이면 난롯가에         

       모여, 불빛처럼 따스한 이야기꽃을 피우던 우리 반 아이들, 학교

       뒤 대학병원 잔디에 앉아 열심히 시계탑을 그리던 소년들, 그리고

       커서 소설가나 무용가가 되겠다던 그 해맑은 얼굴의 소녀들을 생

      각하는 내 마음엔 파란 물감이 든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남과 어울리기가 별로 쉽지 않은 새침데기여

      서 친구나 선생님으로부터종종 핀잔을 받곤 했다. 혼자 조용히 책

     속에 파묻혀 지내며 동화 속의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는  꿈속의

      아이였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는 늘 서둘러 등교 준

    비를 해야 했다. 너무 멍어서 처음엔 심심라던 학교길도 차츰 즐기

    며 다닐 수 있었고, 「 학교 가는 길 」이란 제목의 글을 써서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계절 따라 변하는 플라타너스 길을 걷는 게 나는

   좋았다.

    6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거의 매일 한소녀와 내가 다니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방긋 웃어 줄 수도, 먼저 말을 붙일 수도 있었으련

    만 나는 왠지 쌀쌀한 표정으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시간만 흘

    렀다. 나는 몇 번이고 용기를 내어 먼저 먼저 말을 건네려 결심했지

    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둘이 약속이나 한 듯이 환한 윳음을 나누

    어고, 그 후로는 더없이 정다운 길동무가 되었다. 알고 보니 한 반은

    아니었으나 그는 나와 같은 학년이었고, 내가 좋아하던 여선생님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우리는 항상 붙어 다니며 공부도 열심히 했고,

    삼청공원 약수터에도 자주 놀러 다녔다. 땋은머리에 매는 리본조차

    매일 다른 빛깔을 원할 만큼 허영심 많고 이기적인 나메 비해 그는,

    너무도 꾸밈없고 너그러운 애였다. 하나에서 열까지 나와 비슷한 점

    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늘 마음이 편안

    했고 배우는 게 많았다. 잔걱정이 심하고 우울에 빠지기 쉬운 나에게

    그는 쾌활한 웃음과 용기를 안겨 주곤 하였다. 어느 땐 내가 일부러

    다른 애들과 더 친한 척 행동해도 질투하기는 커녕 기뻐해 주었고,

    작은 일로 쉽게 토라져도 끝까지 참고 이해해 주었다. 그는 참으로

    든든하고 미더운 오빠 같은 길동무, 마음동무였다.

    지난여름, 거의 10년 동안 소식리 끊어진 그와 서울에서 연락이

    닿아 전화를 했더니 대뜸, "내가 너에게 친구로서 죽을 죄를 지었구

    나" 하는데 가슴이 찡했다. 제 웃음같이 크고 시원한 수박덩이를 사

    들고 급히 달려온 그를 보니 퍽도 반가웠웠다. 결혼해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나 왠지 자기는 집안 살림보다는 바깥일에 더 흥미가

    있는 모양이라며 깔깔댔다.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많던 그를 생각하

    고 나도 따라 웃었다. 늘 오빠같이 느껴지던 어릴 적 친구와 오랜만에

    마주 앉아 나는, 어린 시절의 고소한 추억들을  군밤 까먹듯 했다.

   가는 길은 좀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아직도 소중한 길동무들

   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 이해인 수필집 「 두레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