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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패티 젠킨스

주연 : 갤 가돗, 크리스 파인, 크리스틴 위그, 페드로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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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개봉이 연기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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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당국이 사회적거리두기 2.5단계를 발표하자 나는 연말에 개봉 대기 중인 영화들의 개봉 연기를 바랐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19 확진자가 연일 1천 명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더우먼 1984]는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둔 12월 23일 개봉을 강행했다. 마음 같아서는 [원더우먼 1984]를 보기 위해 당장이라도 극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내 속만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원더우먼 1984]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고, 결국 내가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회사에 연차 휴가를 내서 평일 낮에 보러 가는 것이다. 비록 10만 원이 넘는 연차 수당을 포기해야 하지만 평일 낮에는 관객이 별로 없으니 안전할 것이라고 아내를 설득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2021년 새해 첫 날인 1월 1일 조심스럽게 내 계획을 아내한테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대뜸 차라리 오늘 보러 가자고 대답한 것이다. 이게 웬 횡재인가. 아내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극장에 갈 준비를 했고, 코로나19 때문에 신정 연휴 3일 동안 집에서 TV나 볼 계획이었던 나는 그 덕분에 최고로 행복하고 특별한 신정을 보낼 수가 있었다. 언제부터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이렇게 특별한 일상이 되었는지 씁쓸하지만 어찌 되었건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내, 아들과 함께 집 근처 멀티플렉스로 향하면서 걱정이 되긴 했다. 혹시 극장에 사람이 많으면 어쩌나... 그런데 다행히 극장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원더우먼 1984]의 상영관 역시 우리 가족 외에 단 두 명의 관객이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자신 있게 아내에게 '거봐, 극장은 안전하다니까...'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1월에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이 개봉 예정인데 [원더우먼 1984] 덕분에 [소울]은 아내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극장으로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전에 코로나19가 종식된다면 더욱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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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극장에서 영화 관람, 나는 모든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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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은 [이웃사촌] 이후 1개월 만이고, 온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본 것은 [텔넷] 이후 3개월 만이다. 코로나19는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일깨워 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우여곡절 끝에 극장 관람을 하게 된 [원더우먼 1984]를 보는 내내 그 순간을 즐겼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30분으로 꽤 긴 편이었지만 마스크를 쓰고 영화를 봐야 하는 답답한 상황에서도 영화를 보는 1분 1초가 소중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아내와 아들은 영화가 끝난 후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서 조금 지루했다는 평을 남기긴 했지만...

일단 나는 [원더우먼 1984]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2017년에 개봉한 [원더우먼]부터 복기해 보자. [원더우먼]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17년이다. 인간들에게 철저하게 숨겨진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에 영국군 파일럿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 대위가 불시착하며 아마존의 공주 다이애나 프린스(갤 가돗)와의 인연은 시작된다. 다이애나는 1차 세계대전이 전쟁의 신 아레스가 획책한 것임을 알게 되고, 아레스를 막기 위해 트레버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나간다. 그곳에서 팀을 꾸려 독일군을 막아내고, 아레스를 처치하지만, '내가 오늘을 구할 테니, 당신은 세상을 구해요.'라는 명대사를 남긴 트레버의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 이후 다이애나는 인간을 수호하는 진정한 '원더우먼'이 된다.

[원더우먼 1984]는 제목에서 나왔듯이 1984년이 배경이다. 트레버가 죽은 지 67년이 지났고, 다이애나는 고고학자로서 인간들 사이에서 조용히 살아가며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는 평범(?)한 일상을 지속해 나간다. 그러던 중 대형 쇼핑몰의 보석상에 강도가 드는데 '원더우먼'의 활약으로 강도는 체포가 되지만, 그들이 훔치려 한 물건 중 의문의 황수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황수정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데, 문제는 소원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얼떨결에 황수정에 소원을 빌게 되는데, 그녀의 소원은 트레버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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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트레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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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 1984]의 제작 소식이 들려왔을 때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스티브 트레버의 부활이었다. [원더우먼]에서 오늘을 구하고 죽음을 당했던 트레버는 과연 어떻게 [원더우먼 1984]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 만약 그가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가 무려 67년이 지난 1984년에 젊은 모습 그대로 멀쩡하게 복귀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혹시 누군가 트레버에게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갖게 하는 약물('캡틴 아메리카'처럼...)을 주입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트레버가 미래의 1984년에 온 것은 아닐까? 온갖 억측이 난무했고, 나 역시 [원더우먼 1984]를 보기 전, 트레버의 부활이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그 비밀이 풀렸다. 마치 마법의 요술램프처럼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는 의문의 물체 황수정이 그 비밀이었던 것이다. 트레버의 부활은 [원더우먼 1984]의 재미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원더우먼]에서 인간 세상에 처음 나온 다이애나가 저지르는 해프닝이 관객에게 웃음을 안겨 줬다면, 이번엔 반대로 트레버의 차례이다. 1910대에 살았던 트레버에게 1984년은 너무 호화찬란한 미래였던 것. 미래의 생경한 풍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트레버의 모습은 반가움과 웃음을 안겨 줬다. 특히 그가 고집하는 촌스러운 패션은 영화가 1984년을 배경으로 한 복고풍의 영화라고 할지라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황수정에게 소원을 빌어 이룬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한다. 다이애나에겐 그것이 바로 초인적인 힘이다. 1차 세계대전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상처하나 당하지 않았던 다이애나였지만 트레버를 되찾은 대가로 인하여 그녀는 점점 힘을 잃어 간다. 이제 그녀에겐 한 가지 선택이 남았다. 트레버와의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트레버를 포기하고 예전처럼 외롭지만 인간의 수호자로 살 것인가? 소원을 취소해야 한다는 트레버의 간곡한 부탁에도 다이애나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 영화의 오프닝에서 어린 다이애나가 안티오페(로빈 라이트)에게 얻은 교훈이 상기된다. 지는 것보다 더 창피한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트레버는 이미 죽었다는 것이 바로 진실이고, 트레버의 부활을 바라는 것은 결국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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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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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황수정에게 소원을 빈 것은 다이애나뿐만은 아니다. 오랜 세월 소원을 들어주는 황수정을 추적했던 사업가 맥스웰 로드(페드로 파스칼)는 자신의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하자 더욱 황수정에 집착하고 드디어 손에 넣는다. 그런데 그가 황수정에 빈 소원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황수정이 되는 것이다. 황수정에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 맥스웰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단 한 번의 소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황수정의 능력이다. 그렇게 맥스웰은 스스로 황수정이 되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으면서 한도 끝도 없는 자신의 욕심을 채워 나간다.

그리고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폭주하는 인물이 또 있다. 바로 다이애나의 직장 동료인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이다. 소심한 성격의 그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왕따였지만, 황수정에 자신이 평소 동경하던 다이애나처럼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빌면서 갑자기 인기녀에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갖게 된다. 다이애나는 바바라에게 소원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지만 오히려 바바라는 다이애나를 공격해서 맥스웰을 구해내고, 맥스웰에게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빌면서 슈퍼 빌런인 치타가 된다.

고작 소원을 들어주는 것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할까 싶었지만 위성 전파를 통해 맥스웰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 세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전쟁광들은 무기를 원했고, 그로 인해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한다. 서로 싸우던 이들은 소원으로 상대방에게 저주를 퍼부었으며, 그로 인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만약 누군가 내 소원을 이뤄 준다면 세상은 천국과도 같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세상은 그 어떤 지옥보다도 참혹했다. [원더우먼]에서 전쟁을 통해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보았던 다이애나는 이번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도 인간을 책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트레버의 부활 앞에 그녀 자신도 유혹에 흔들렸으니까. 한국어 포스터에 '거부할 수 없는 적을 만나다'라는 문구는 [원더우먼 1984]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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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선물과도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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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원더우먼 1984]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단순히 슈퍼 히어로 '원더우먼'의 멋진 활약을 담아낸 것이 아닌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관객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 앞에 소원을 들어주는 황수정이 있다면 과연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고귀한 존재인 다이애나조차도 죽음으로부터 살아 부활한 트레버 앞에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진실을 외면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영화가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이 거대한 혼돈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걱정이 되긴 했다. 사건을 크게 벌려 놓고 얼렁뚱땅 마무리 짓는 용두사미식 영화를 너무나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원더우먼 1984] 또한 거대한 혼돈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다. 그저 소원을 취소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된다니... 이렇게 쉬운 방법이? 게다가 '원더우먼'의 호소에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소원을 취소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이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져놓고, 너무 안일하게 인간의 양심에 호소를 하는 마무리를 만들어 놓다니, [원더우먼]의 결말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패티 젠킨스 감독이지만 이번 [원더우먼 1984]의 결말에는 큰 점수를 줄 수 없을 듯하다. (아들은 '원더우먼'이 뜬금없이 하늘을 나는 장면이 가장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나는 [원더우먼 1984]에 만족했다. 2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내가 불만족스러웠던 부분은 마지막 결말 약 10여 분뿐이었으니까. 물론 영화의 결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극장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봤다는 만족감이 이 영화의 실망스러운 결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쿠키영상에서 내 어린 시절 TV 외화 시리즈 <원더우먼>에서 봤던 린다 카터의 등장은 선물과도 같았다. 코로나19에 지친 나를 위한 깜짝 선물. 이렇게 [원더우먼 1984]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에겐 선물과도 같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