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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박지완

주연 :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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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과의 악연을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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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은 역대급 무더위가 한반도를 덮쳤었다. 그 해, 하필 나는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였다. 불결한 환경 탓에 내무반에는 눈병이 돌고 있었고, 나는 장염에 걸려 입소하자마자 일주일간 군 병원에 입원을 하기까지 했다. 장염이 다 낫지는 않았지만 퇴소 조치를 피하기 위해 퇴원 후 훈련에 임해야 했던 나는 정말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때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헌혈을 하면 훈련에서 빼주고 반나절 동안 내무반에서 휴식을 취하게 해주겠다는 전달 사항에 내려온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훈련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섰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헌혈을 하지 못했다. 역대급 무더위에 장염까지 걸려 식사를 제대로 못했더니 내 몸무게는 50kg이 되지 않았고, 몸무게 미달로 헌혈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대부분의 건장한 훈련병은 헌혈 후 내무반에서 쉬고 있는데, 몇몇 건강하지 못한 훈련병들만 헌혈을 하지 못해 뙤약볕 아래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상황. 그때 나는 다짐했다. 내가 필요로 할 때 나를 외면한 헌혈, 앞으로 헌혈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게 외면하겠다고...

어이없게도 나는 26년 전의 다짐을 최근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회사 동료의 가족 중 급성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있어서 AB형 혈액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내가 AB형이기에 나는 이번에야말로 26년 전의 어이없는 다짐을 깰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진해서 헌혈을 하기로 했다. 내가 하기로 했던 헌혈은 혈소판 헌혈로 일반 헌혈과는 달리 1시간에서 2시간가량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도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니 모든 걸 감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헌혈 센터에 가니 내 혈관이 너무 약해서 혈소판 헌혈을 하기엔 부적합하다며 또다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순간 나는 내 혈소판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며 거의 애원을 했다. 1994년 8월의 악몽이 또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1994년에는 결국 헌혈이 나를 외면했지만, 2020년 11월에는 헌혈을 할 수 있었다. 나의 빨간 피에서 추출된 노란 혈소판을 보며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헌혈을 마친 후 점심 식사를 든든하게 하고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그날 내가 본 영화는 [내가 죽던 날]이다. 사실 김혜수가 주연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헌혈과의 악연을 정리한 날과 아주 딱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때 함께 그 시련과 맞서주며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든든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 곁에 아무도 없다면... [내가 죽던 날]은 견디기 힘든 시련을 겪었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이다. 그녀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단 한마디였다. '네가 널 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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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살기 위해 일을 다시 해야 하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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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대를 수석으로 졸업 후 탄탄대로를 걸었던 현수(김혜수)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변호사인 남편(김태훈)의 외도였다. 너무나도 믿었던 남편의 배신이었기에 현수의 상처는 컸다. 그리고 그 상처를 안고 사건 현장으로 출동을 하던 중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징계 대상까지 된다. 그녀는 스스로가 꽤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모르는 사이 남편의 외도는 진행되고 있었고, 결국 그녀의 행복을 산산조각 낸 것이다. 어떻게 몰랐을 수가 있을까? 현수는 자책했다. 그녀의 자책은 자기혐오가 되었고, 그녀의 정신을, 육체를 조금씩 갈아먹었다. 현수는 그저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복직을 해야 한다. 일을 해야만 잠시라도 남편의 외도를 잊을 수 있고, 자기혐오도 멈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정식 복직 전, 그녀가 맡은 것은 태풍이 몰아치던 밤, 외딴섬에서 유서 한 장만을 남긴 채 사라진 세진(노정의)의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 사건은 간단해 보였다. 세진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살이 명확해 보였다. 그렇게 현수는 세진이 목숨을 끊은 섬으로 향한다.

경찰이 집에 들이닥치기 전까지 세진의 삶은 나름 행복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지만 아버지의 동거녀인 정미(문정희)를 친어머니처럼 따르며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그런데 그녀가 모르는 사이 아버지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세진의 인생은 산산조각이 난다. 결국 아버지는 죽었고, 세진은 중요 증인으로 경찰의 보호 조치가 내려져 외딴섬에 오게 된다. 현수가 그랬던 것처럼 세진은 자신을 자책했을 것이다. 어떻게 몰랐을 수가 있을까? 너무 어렸던 그녀는 이 힘든 시련을 누군가에게 기대어 이겨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같았던 정미는 경찰 조사가 끝나자마자 자취를 감춰 버렸고, 외딴섬에서 세진이 유일하게 기댄 담당 경찰 형준(이상엽)은 어느 날 갑자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너무 힘든데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절벽으로 가기 전 그녀는 멍한 눈으로 경찰이 설치한 CCTV를 바라본다. 현수는 CCTV 속 세진의 표정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느낀 것이다.

현수가 세진의 사건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한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상부에서는 빨리 자살로 종결되기를 원하지만 현수는 세진의 주변 사람들을 철저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무도 세진을 진심으로 도와주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에 그녀에게 찾아온 시련을 세진은 혼자 감당했고, 결국 살기 위해 복직해야 했던 현수처럼 세진 역시 살기 위해 죽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세진의 사건을 종결한 현수는 남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세진을 통해 현수는 나를 구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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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의 사연을 쫓아가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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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던 날]은 굉장히 감각적인 영화이다. 솔직히 영화의 내용은 큰 울림이 없다. 특히 현수의 사연이 거의 생략되다시피하다 보니 영화 초반 관객 입장에서는 감정이입을 해야 할 캐릭터를 찾지 못한다. 김혜수는 생략된 현수의 사연을 연기력으로 완벽하게 커버한다. 항상 당차고 자신만만하게만 보였던 김혜수가 자기혐오에 빠져 의기소침해 보이는 현수를 연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수가 당했을 시련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될 정도였다. 그와는 반대로 세진의 사연은 꽤 비중 있게 다뤄진다. 아마도 베테랑 연기자인 김혜수에 비해 아역 배우 출신 신예 노정의의 연기력이 떨어지기에 선택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정의가 연기를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세진은 사랑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사춘기 소녀로는 드물게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한 정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정미에게 세진은 그저 돈 많은 동거남을 붙잡을 수 있는 인질에 불과했다. 세진의 아버지의 범죄 행위가 드러나고 사고사로 죽자 정미는 미련 없이 세진의 곁을 떠난다. 겉으로는 사건이 잠잠해지면 다시 찾으려 했다고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진의 어머니 역할을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신을 믿지 않은 동거남에 대한 분노만 얼굴에 드러낸다. 형준도 마찬가지이다. 형준에게 있어서 세진은 이용할 가치가 있는 증인에 불과했다. 세진은 형준에게 매달렸고, 형준은 그러한 세진을 이용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세진이 형준에게 사랑을 느꼈고, 형준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더 이상 세진에게 나올 증거가 없음을 깨닫자 형준 또한 미련 없이 세진을 버린다.

만약 내가 세진이라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도 없는 외딴섬. 믿었던 가족, 사랑했던 남자의 배신, 어쩌면 나라도 자기혐오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바보같이 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 자책하며... 세진이 유서 한 장을 남겨 놓은 채 절벽으로 간 것도 이해가 된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정도의 자기혐오에 빠져 있고, 그것을 보듬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결국 선택지는 하나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때 순천댁(이정은)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고 식물인간이 된 조카를 정성껏 돌봐주는 순천댁. 그녀 또한 죽기 위해 농약을 마셨고, 그로 인하여 목소리를 잃었다. 순천댁은 힘겹게 세진에게 메모를 전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네가 널 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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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널 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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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던 날]의 메시지는 바로 순천댁의 한마디이다. '네가 널 구해야지.' 이 한마디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의 내용은 큰 울림이 없다. 세진의 사연은 아침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바람난 남편과 배신당한 아내의 이야기일 뿐, 당사자에겐 큰 사건일지 몰라도 제3자의 입장에선 흔하디흔한 사연일 뿐이다. 세진의 사연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버지가 범죄로 번 돈 덕분에 그 딸은 편안하게 산 것 아닌가?'라는 비뚤어진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 세진은 뉴스에서나 나옴직한 범죄자의 자식일 뿐이기에 관객의 동정을 사기엔 부족함이 있다. 박지완 감독이 영화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으려 했다면 현수, 세진의 사연을 일상적인 것이 아닌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들로 채워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박지완 감독이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사연 팔이에 연연하지 않을 것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너무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사연은 영화의 재미를 풍성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관객의 공감을 사기 어렵다. 그에 비해 현수, 세진의 사연은 충분히 공감을 살 수가 있다. 어쩌면 나 자신이, 혹은 내 주변이 겪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연이 공감을 샀기에 영화의 메시지도 뚜렷하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당신이 만약 큰 시련에 빠져 있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하도록 노력을 하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곧바로 현수에게 전달되어 현수가 시련을 이기도록 도와준다.

뉴스에서 자살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죽을 작정으로 노력한다면 될 텐데, 왜 그냥 죽으려 하는 것일까? 정답은 자기혐오이다. 내가 죽도록 싫으니 죽는 것 외엔 다른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자기혐오에 빠지는 순간 삶의 희망은 사라진다. 그럴 때마다 순천댁의 한마디를 생각하자. '네가 널 구해야지.' 내가 날 구하지 않는데, 남이 날 구해주길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니까. 영화의 내용은 큰 울림이 없지만 영화의 메시지는 큰 울림이 있다. 그것이 [내가 죽던 날]이 코로나19로 인하여 힘겨운 가을, 내가 숨겨진 보석 같은 영화라고 감히 칭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나도 내가 날 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 테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남도 구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남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 당장 헌혈센터에 가서 헌혈을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