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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28년 전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를 회상하며 즐겁게 관람했다.
13  쭈니 2020.10.30 16: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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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종필

주연 : 고아성, 이솜, 박혜수

그땐 그랬지

레트로 열풍이 불고 있다. 한동안 트로트가 대세이더니 요즘은 90년대 히트곡을 소개하는 TV 프로가 심심치 않게 방송된다. 90년대에 20대 청춘을 보냈던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음악에서부터 시작된 레트로 열풍은 영화로도 옮겨 갔는데, 지난 10월 21일 개봉하여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상당히 반가웠다. 사실 코로나19 때문에 대작 영화들이 개봉 시기를 미루는 바람에 요즘 극장가에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는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개봉한 덕분에 이번 주는 극장에서 내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 삼진그룹의 입사 8년 차 동기인 말단 여직원들의 이야기이다. 토익 600점만 넘기면 대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모여든 그녀들. 하지만 그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임신과 동시에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쫓겨나듯 퇴사를 당하는 선배가 그들의 미래 모습일 뿐이다. 하지만 이자영(고아성)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커피 심부름에 온갖 잡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멋진 커리어 우먼을 꿈꾸며 오늘도 활기차게 업무를 시작한다.

정말 그땐 그랬다. 내가 상고를 졸업하고 종로의 작은 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 1992년. 당시 회사엔 상고를 졸업하고 입사한지 10년이 넘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회계부 누나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한 정말 예쁜 편집부 신입 누나가 입사를 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회계부 누나는 눈물을 흘리며 회사를 관뒀다. 입사 10년차 회계부 누나가 받는 급여보다 대졸 신입 편집부 누나가 받는 급여가 훨씬 컸던 것이다. 당시 회계부 누나는 상무님께 항의를 했지만 '빨리 시집이나 가라'는 퉁명스러운 대답만 들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바로 회사를 관두고 대학 입시를 준비했었다. 28년이 지났고 그때와 비교해서 회사 문화도 많이 바뀌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내가 만약 대학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회사에 계속 근무를 했다면 생활의 질이 지금보다 훨씬 떨어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근본적인 것은 결국 바뀌지 않았으니까...

고졸 말단 여직원들의 이야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고졸 말단 여직원들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그들은 입사 8년 차로 설정되어 있으니 얼추 나의 첫 직장의 입사 10년 차 회계부 누나와 비슷한 연배인 셈이다. 그녀들의 사정 또한 내 기억 속의 회계부 누나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회계부 누나는 직원 10명 안팎의 작은 소기업에 다녔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닌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회사 내에서의 위치는 엇비슷하다. 세탁기와 분리된 건조기 아이디어를 낼 만큼 의욕도 넘치고 능력도 있는 생산관리 3부 이자영은 그러나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남직원들 커피 타는 일과 자질구레한 잡심부름이 전부이다.

사정은 회계부 심보람(박혜수)도 다르지 않다.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에 숫자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없는 자체 회계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목표인 그녀. 봉현철(김종수) 부장의 놀라운 천재성을 빗대어 아마데우스라 칭했지만 현실은 그저 가짜 영수증 메꾸는 일이 전부이다. 마케팅부 정유나(이솜)는 회사 홍보에 대한 혁신적인 문구를 생각해 내지만 그 공로는 대졸 여직원 조민정(최수임) 대리가 가로채간다. 정유나와 조민정 대리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28년 전 회계부 누나와 편집부 누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대졸과 고졸의 차이는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았다. (요즘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주변엔 웬만하면 거의 대졸이라서...) 그녀들은 퇴근 후 영어토익반에 모여 토익 공부에 열중한다. 고졸 말단 사원을 벗어나 대리라는 직함을 받기 위해...

하지만 토익점수 600점을 넘어 대리 직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자영이 우연히 옥주 공장의 페놀 유출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지만 회사는 그것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영은 보람, 유나와 함께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하지만 그 싸움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부 고발자에 대한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게다가 힘없는 고졸 말단 여직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영화 시작에 앞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라는 자막이 먼저 나온다. 그렇다. 모두들 잘 알고 있겠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1년 3월 구미 공업단지에 위치한 두산전자에 의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두산전자는 1990년 6월부터 6개월 동안 약 325톤의 페놀을 무단 방류했고, 그로 인하여 낙동강을 상수원으로 하고 있는 대구 지역의 사람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은 우리 사회를 크게 바꾸어 놓았는데 1994년까지는 먹는 생수는 법적으로 판매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돗물에 대한 불신 여론이 크게 번지며 결국 생수 판매를 합법화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쩌면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없었다면 아직도 우리는 '왜 물을 돈 주고 사 먹어?'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페놀 유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정의로운 주인공의 모험담에 치중했다면 어쩌면 이 영화는 그저 평범했을지도 모른다. 페놀 유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최동수(조현철) 대리가 전면에 섰다면, 아니 담당 검사(김태훈)가 거대 기업의 비리를 파헤쳤다면, 그것도 아니고 작은 신문사 기자들이 특종을 터트렸다면, 아마도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흔히 생각해낼 수 있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의 전개일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종필 감독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고졸 말단 여직원들에게 무거운 짐을 맡긴다.

이 영화 속 소위 권력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최동수 대리는 이렇게 귀찮은 일을 우리가 왜 나서야 하냐며 모른척하자고 하고, 담당 검사는 그저 수사를 하는 시늉만 할 뿐이며, 신문사 기자들은 자영 일행이 증거를 모두 갖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보도가 데스크에 막혔다며 '세상은 변하지 않아요.'라고 푸념만 할 뿐이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실 속 검사와 기자는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정의롭지도 않다.) 하지만 자영을 비롯한 고졸 말단 여직원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다니는 삼진그룹이 좋은 회사라는 믿음으로 모든 불공평을 참아 냈기에, 삼진그룹이 저지른 비리를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가진 것이 없기에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그녀들은 비록 힘은 없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놀라운 힘

영화를 보기 전 [전국노래자랑], [도리화가]의 이종필 감독의 영화라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깜짝 놀랐다. 이종필 감독은 90년대 회사 분위기를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 당시를 경험해보지 않은 젊은 관객들에겐 낯선 풍경이겠지만 그 당시에 회사를 다닌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90년대로 훌쩍 갔다 온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회계부 누나가 이 영화를 봤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여기에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라는 우리 사회를 크게 바꾸어 놓은 실화를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잘 잡아냈다. 특히 뻔하지 않은 주인공이 아닌 고졸 말단 여직원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활약담이라서 영화적 재미가 훨씬 컸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스릴러 영화 같다. 처음엔 이 영화가 삼진그룹의 고위층이 저지른 페놀 유출 사고를 은폐하려는 회사의 음모와 이를 밝히려는 고졸 말단 여직원들의 대결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미 페놀 유출 사고의 범인은 회장의 아들 오태영(백현진) 상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그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중요한 키포인트라 생각했다. 하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페놀 유출 사고를 이용하여 회사를 장악하고 해외 기업에 싼값에 넘기려는 다국적 M&A 기업의 음모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복잡함 때문이다. 이종필 감독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많은 것을 담아냈다. 90년대 학력 차별, 남녀 차별이 만연했던 회사의 분위기와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그리고 회사를 지키려는 고졸 말단 여직원들의 활약까지... 이 모든 것이 영화 속에서 매끄럽게 진행된다. 자칫 너무 많은 요소들 때문에 영화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하게 영화를 진행한다. 이종필 감독이 이렇게 놀라운 능력이 있는 감독일 줄이야. 이종필 감독에게 한마디를 하자면... ' 어제의 이종필 감독보다 오늘 더 성장했다'

마지막 낙천적인 마무리가 옥에 티

이제 자영 일행은 페놀 유출 사건의 진실이 아닌 회사 지키기에 나선다. 이를 위해 페놀 유출 사건의 주범이지만 그래도 회장의 아들인 오태영 상무를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페놀 유출 사건으로 체포되며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자 이번엔 회사의 창립자인 오회장(박근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강제 M&A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상대는 굉장히 막강하고 쓸데없이 꼼꼼하기까지 하다. 과연 이 싸움에서 자영 일행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 걸까? 만약 현실이라면 '없다'라는 대답이 당연히 따라 나올 것이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의 매력이 아니던가.

솔직히 너무 낙천적이었다. 고작 개미의 힘을 모아 오랜 기간 계획한 다국적 M&A 그룹의 음모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영과 그의 일행은 해낸다. 그렇기에 짜릿하긴 하다. 나 역시 개미이니까. 한 명의 개미는 소액 주주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개미들이 힘을 모은다면 못해낼 것이 없다. 그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현실적으로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영화를 보며 너무 낙천적인데...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고졸 말단 여직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현실에선 불가능한 판타지뿐인 것을...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즐거웠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사회 초년생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고, 고아성, 이솜, 박혜수의 멋진 연기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이야기 전개가 워낙 자연스럽고 매력적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에 몰입했다. 비록 건너편 관객이 영화 도중 자꾸 핸드폰을 보는 바람에 핸드폰 불빛이 나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오랜만에 극장에 왔고,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봤기에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다음날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여직원들을 보며 나는 과연 봉현철 부장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안기창(김원해) 부장 같은 사람일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28년 전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회계부 누나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사회생활의 냉혹함을 처음 깨달았던 갓 상고를 졸업한 풋내기였던 나는 과연 어떤 직장 상사로 변했을까? 마음 같아서는 회사 여직원들과 다 함께 단체 관람을 하고 이야기꽃을 나누고 싶은 영화였다. (물론 회사 여직원들이 꼰대 부장과 영화 관람을 할 리가 없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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