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지어’ 새로운 시작, 당신을 응원합니다.

나는 대학에서는 유전공학을, 대학원에서는 뇌신경과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목표였으니, 석사학위를 마치면 해외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미개척 분야인 뇌과학에 한 획을 긋고 싶어서 나름 큰 포부를 가지고 진학한 대학원이었다.

스트레스와 치매 관련 연구를 하던 어느 날, 옆 실험실의 괴짜 오빠가 점성술로 점을 쳐준다기에 호기심에 그러라고 했다.

“넌 왜 박사학위를 따려 그래? 이걸 못하는 건 아닌데, 네 진짜 재능은 다른 데 있다고 나오네?”

‘내가 이 분야에 진정한 재능이 있을까? 내가 정말 이 일을 해도 되나?’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서 이런 의심의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괴짜 오빠의 점괘는 애써 무시하려 했던 고민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게 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내 어린 시절의 꿈이 생각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고, 종종 사촌들의 음악과 미술 숙제를 떠안을 만큼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음악이나 미술을 말 그대로 ‘교양’에 가까웠고 업으로 삼기는 힘들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자연스레 공학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그게 내가 갈 길이라 생각하며 달려왔던 차였다.

더 늦기 전에 한 번쯤은 내가 잘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석사논문을 마친 상태였고, 이미 나이는 20대 후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와서 길을 바꾸면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오랜 고민 끝에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 지금이 아니면, 더 늦으면 정말 못할 것 같았다. 가보지 않은 길을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았기에 안정적인 길을 버리고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러 시도와 실패, 방황을 거듭하던 어느 날, 책에서 플로리스트 관련 글을 읽고는 당장 학원에 등록했다. 그저 예쁜 꽃 실컷 보면서 마음의 위로나 받아 보자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처음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꽃을 배우러 갔다. 꽃이 마냥 예쁘고 좋았으니까. 후에 그것이 나의 직업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처음 학원에 들어섰을 때 맡았던 그 향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테이블 위에 익숙한 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졸업식의 단골손님이자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꽃, 노란 프리지어. 익숙한 꽃이기는 하지만 처음 접해 보는 꽃꽂이어서 이리저리 헤매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마음처럼 안 되어 짜증날 법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헤매는 시간마저도 너무 즐거워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싶을 만큼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어 몰입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프리지어의 꽃말은 이랬다.

‘새로운 시작, 긍정적인 마음, 당신을 응원합니다.’

이런 꽃말의 꽃을 통해 꽃과의 동행을 시작해서 그랬는지, 우연인 듯 인연처럼 난 오늘도 꽃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그날 새로운 시작을 했고, 그 작은 꽃들의 들리지 않는 응원을 받았다.

그날 이후로 꽃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걸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만큼 나는 이 일을 사랑한다. 보이는 것만큼 예쁘기만 한 직업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꽃을 사랑하고 그들이 내게 속삭이는 시간이 행복하다. 그날의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앞둔 인생들에게 고운 응원이 가득하기를.

꽃 한 송이 하실래요 <홍사라> 글그림

책이있는풍경, 2020년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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