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받는 그들에게도 행복은 오는가? [용길이네 곱창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쭈니 2020.06.12 11:41:47
한 달 동안 나의 일상을 지배했던 '별이 빛나는 밤에' 1000피스 직소퍼즐을 완성하고 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금 영화에 빠져들기로 했다. 최근 프라임무비팩을 새로 결재한 Seezn에서 눈에 확 들어온 영화는 요즘 가장 핫한 배우인 이정은 주연의 일본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과 제72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그런데 막상 이 두 영화를 보고 나니 주제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억압받는 재일 교포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는 18세기 유럽 여성들. 이 두 영화는 주인공이 억압을 뚫고 어떻게든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내용이다.
[용길이네 곱창집] - 설령 어제가 어떤 날이었든지 내일은 분명히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감독 : 정의신
주연 : 김상호, 이정은, 마키 요코, 이노우에 마오, 사쿠라바 나나미
[용길이네 곱창집]은 1969년 고도성장이 한창이던 일본 오사카 공항 근처 판자촌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재일교포가 모여 사는 이곳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는 용길(김상호)에겐 재혼한 부인 영순(이정은)과 딸 셋,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첫째 딸 시즈카(마키 요코)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 테츠오(오오이즈미 요)와 오사카 공항에 몰래 들어갔다가 경비견에게 물려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 신세이고, 둘째 딸 리카(이노우에 마오)는 아직도 시즈카를 잊지 못하는 테츠오와 결혼 후 갈등을 빚고 있다. 셋째 딸 미카(사쿠라바 나나미)는 유부남인 하세가와(오타니 료헤이)와 사랑에 빠져 있으며 막내아들 토시오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문제투성이인 자식들을 이끄는 용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한쪽 팔을 잃었다. 해방 후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때 하필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 친척은 물론 고향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몰살당하는 바람에 고향을 잃었고, 겨우 살아남아 어린 딸 미카와 함께 일본으로 밀입국한 영순과 부부의 연을 맺고 이제는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중이다.
영화는 사연 많은 용길의 가족과는 달리 꽤 잔잔한 편이다. 판자촌 동네 사람들은 '용길이네 곱창집'에 옹기종기 모여 술타령이나 벌이고, 그러한 와중에 시즈카, 리카, 미카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약간은 코믹하게 펼쳐질 뿐이다. 물론 학교에서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토시오의 장면에서 영화의 감정선이 폭풍처럼 한꺼번에 휘말아치지만 [용길이네 곱창집]은 대체적으로 담담한 분위기로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용길은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일본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일을 했다. 자식들만이라도 일본인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의 굳은 다짐은 토시오의 자살로 무너진다. 토시오를 억지로 일본의 사립 학교에 입학시킨 용길은 토시오가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는 학교에서의 괴롭힘 문제 따위는 버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토시오의 문제를 애써 모르는척한다. 하지만 그 결과 토시오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다. 그럼으로써 용길은 깨닫는다. 참고 견디며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1971년 봄, 재개발로 인하여 판자촌 동네는 허물어지고 그곳엔 공원이 생긴다. 영화의 마지막은 결혼과 함께 뿔뿔이 흩어지는 용길 가족의 모습이다. 시즈카와 테츠오는 북한행을 결심하고, 리카와 일백은 남한행을 선택한다. 미카는 일본인인 하세가와와 결혼함으로써 유일하게 일본에 남는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해졌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북한에 간 시즈카도, 남한에 간 리카도, 그리고 일본에 남은 미카도, 그들의 앞 길에 또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어떤 시련에도 용길과 영순이 그러했듯이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치는 것뿐...
[용길이네 곱창집]은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소재의 영화는 아니다. 만약 김상호, 이정은이 주연을 맡지 않았다면 그냥 흘려버렸을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들었다. 가끔 재일 교토 2세를 연기한 일본 배우들의 서툰 한국어 연기가 거슬리긴 하지만 용길과 영순의 자식들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그것보다는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도 아닌 상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용길의 가족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먹먹했다. 그들의 앞 날은 여전히 깜깜하지만 용길은 그래도 희망을 가진다. 그렇기에 용길의 마지막 대사가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가 있지. 설령 어제가 어떤 날이었든지 내일은 분명히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억압받는 용길의 가족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은 유일한 행복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감독 : 셀린 시아마
주연 : 아델 하에넬, 노에미 메를랑
18세기 프랑스. 여류 화가인 마리안느(노에미 매를랑)는 귀족의 딸인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초상화를 의례 받고 외딴섬으로 향한다.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은 딸의 혼사를 위해 초상화를 의례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결혼에 대한 반항으로 엘로이즈는 화가 앞에서 포즈 취하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마리안느는 화가라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엘로이즈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모습을 관찰 후 몰래 그리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면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어느 순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사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개봉했던 지난 1월 16일만 하더라도 내 기대작 목록에는 이 영화가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영화적 취향은 프랑스 영화, 그것도 칸영화제에 출품된 예술영화와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Seezn에 등록된 전문가 평점에서 이용철이라는 평론가의 '[피아노] 이후 26년, 캠피온의 위대한 딸들'이라는 의미심장한 한 줄 평을 읽은 후 마음이 바뀌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중 내게 유일하게 감동의 눈물을 안겨준 영화였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혼자 이 영화를 본 후 너무 감동을 받아 마이클 니만의 피아노 선율이 매력적인 OST를 구매했고, 나중에 [피아노]가 비디오로 출시되자 구매해서 몇 번이나 보곤 했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피아노]의 감동을 느낄 수가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분명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피아노]의 필이 강하게 풍기기는 했다. 하지만 [피아노]는 극장에서 보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안방에서 혼자 스마트폰으로 봤기 때문인지 몰라도 [피아노]의 감동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영화를 보다가 살짝 졸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잘 만든 영화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아델 하에넬과 노에미 메를랑의 눈부신 연기와 예술가적 혼을 가지고 있지만 남성의 전유물 취급을 받아야 했던 여성의 억압된 삶을 잔잔하게 풀어낸 셀린 시아마 감독의 연출력도 돋보였다.
특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서서히 느껴가는 과정이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져있다. 처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그저 자신의 산책 친구쯤으로 생각한다. 이미 첫째 딸이 강제 결혼을 거부하며 해안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백작 부인은 둘째 딸인 엘로이즈를 저택 안에만 가둬 놓았던 것. 마리안느 덕분에 답답한 저택을 나와 자유롭게 해안가를 산책할 수 있게 된 엘로이즈.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인하여 가장 기본적인 자유마저 빼앗긴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시선은 동정에서 점점 사랑으로 바뀌어간다.
백작 부인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인 소피(루아나 바야미)가 서로 의지하며 보내는 며칠 간의 시간은 잔잔한 분위기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가장 활기차다. 그리고 백작 부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다시금 숨이 탁하고 막히는 분위기로 돌아간다. 그 만큼 세 여성을 감싸는 억압적인 분위기를 셀린 시아마 감독이 잘 표현한 듯하다. 물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이어지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는 그들에겐 사랑을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공연장에서 엘로이즈를 발견한 마리안느의 시선은 애틋했다. 영화는 롱테이크로 엘로이즈의 모습을 담으며 끝을 맺는다. 그것은 아마 엘로이즈를 향한 마리안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그렇게 멀찌감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여성에 대한 억압을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버텨 나갈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고품격 퀴어 영화라는 표현이 딱 알맞은 영화이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2016년 국내 개봉한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주연의 [캐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15세 관람가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노출 수위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마리안느의 음모가 나오는데도 15세 관람가라니... 솔직히 그 장면에서 충격을 느꼈다. 한때 한미모하던 발레 리아 골리노의 모습도 충격적이었다. 내가 너무 젊은 시절의 발레리아 골리노만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그녀의 미모가 가장 돋보였던 [못말리는 비행사]가 벌써 28년 전 영화이니... 비록 살짝 지루함을 느낀 영화이지만 나중에 멜랑꼴리한 기분에 사로잡혔을 때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