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 - 과연 2천만 파운드짜리 이야기답게 재미있다.
쭈니 2020.02.27 14:11:37
감독 : 가이 리치
주연 : 매튜 맥커너히, 찰리 허냄, 휴 그랜트
기분전환이 필요한 요즘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내 인생에서 IMF 사태 이후 요즘처럼 난리 북새통은 없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도 자칫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와 회사가 폐쇄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을 철저하게 하고 있으며, 집에 와서도 TV만 틀면 온통 코로나 19 뉴스만 나와서 나를 겁먹게 만든다. 될 수 있으면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하고 있으며, 주말에도 어김없이 방콕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답답하고 짜증 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국민 모두가 힘을 합쳐 코로나 19 사태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난리는 요즘 극장가도 마찬가지이다. 기대작들은 줄줄이 개봉 연기를 발표했고, 개봉한 영화들도 흥행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사실 이번 주에는 [사냥의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개봉이 연기되는 바람에 어정쩡한 기대작인 [젠틀맨]과 [인비저블맨]만 개봉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이번 주 영화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요즘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는 영화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텅 빈 극장이 오히려 더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젠틀맨]과 [인비저블맨]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젠틀맨]을 선택했다. 요즘과 같은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장르가 공포인 [인비저블맨]을 보는 것은 꺼려진다. 그에 반해 [젠틀맨]은 경쾌한 분위기의 범죄 스릴러인 만큼 기분전환에 알맞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 판단은 딱 들어맞았다. 확실히 [젠틀맨]은 기분전환을 위한 킬링타임 영화로 딱 좋았다. 데뷔 초, 경쾌한 분위기의 범죄 스릴러인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내치]로 명성을 쌓아 올린 가이 리치 감독이 오랜만에 자신의 주특기를 발휘했는데, 덕분에 코로나 19 때문에 쌓일 대로 쌓인 답답함과 짜증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가 있었다.
정글의 왕 믹키 피어슨의 이야기
기본적으로 [젠틀맨]은 유럽을 장악한 마리화나 제국의 최강자 믹키 피어슨(매튜 맥커너히)의 이야기이다.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했지만 명석한 두뇌 덕분에 옥스퍼드 장학생이 된 믹키는 옥스퍼드에서 마약 판매상이라는 새로운 재능을 발견, 이후 온갖 더러운 방법을 동원하여 정글의 왕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범죄가 난무하는 정글에 회의를 느낀 믹키는 은퇴를 결심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미국의 억만장자 매튜(제레미 스트롱)에게 4억 달러에 넘길 계획을 세운다. [젠틀맨]은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믹키가 모든 것을 넘기고 은퇴한다는 소문이 돌자 파리떼가 꼬여든 것이다. 믹키에게 원한이 있는 신문사 편집장 빅 데이브(에디 마산)은 사립탐정 플레처(휴 그랜트)를 고용해서 믹키의 구린 뒤를 캐게 하고, 중국 마피아인 삼합회 출신의 드라이 아이(헨리 골딩)는 믹키에게 그의 모든 사업장을 싼 가격에 넘기라고 압박한다. 급기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이 믹키의 대마초 농장을 터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다.
가이 리치 감독의 초기 범죄 스릴러가 그러했듯이 [젠틀맨]에도 믹키를 중심으로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렇기에 자칫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이 리치 감독이 그렇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이 수많은 캐릭터의 등장과 그로 인하여 꼬일 대로 꼬인 이야기는 플레처와 믹키의 최측근인 레이먼드(찰리 허냄)의 대화로 완벽하게 정리된다. 과연 가이 리치 감독다운 발상이다.
2천만 파운드짜리 이야기
수많은 캐릭터와 그로 인하여 꼬일 대로 꼬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화자(話者)의 등장이다. 영화 속의 캐릭터 중 하나가 이 복잡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영화가 진행된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에 대한 이해가 쉬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개연성 없이 갑작스럽게 화자를 등장시킬 수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들은 주인공, 혹은 주인공의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캐릭터에게 화자를 맡기는 경우가 많다.
[젠틀맨]에서 화자는 플레처이다. 그는 빅 데이브의 의례로 믹키를 미행하면서 그동안 믹키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목격했던 것이다. 플레처는 그동안 수집한 증거들을 가지고 빅 데이브에게 가는 대신 믹키의 최측근인 레이먼드를 찾아가 2천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레이먼드에게 이야기해주는데 그러면서 복잡해 보이는 [젠틀맨]의 스토리 라인은 플레처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쉽게 설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설명만 되면 영화가 재미없다. 플레처가 간파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있어야 영화의 반전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돌발 상황은 거리의 부랑아들을 운동선수로 키우는 일명 코치(콜린 파렐)라는 캐릭터에게 맡겨진다. 믹키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렇기에 플레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인 코치는 영화 후반부의 극적인 장면을 완성함으로써 [젠틀맨]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단순하지도 않게끔 이끌어준다.
왜 마리화나냐고?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따지고 보면 범죄자에 불과한 주인공을 관객이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고 응원할 수 있느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는 주인공보다 더 악독한 범죄자를 등장시켜 상대적으로 주인공이 별로 악하지 않다고 착각하게끔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젠틀맨]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주인공인 믹키 자체가 애초에 유럽 마리화나 업계의 최강자이고, 믹키를 위협하는 더 악독한 범죄자는 없다. 그저 믹키의 것을 탐하다가 죽어나가는 희생자들만 있을 뿐이다. 결국 [젠틀맨]에서 가장 악독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주인공 믹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관객은 믹키를 응원할 수가 있을까?
가이 리치 감독은 제목에서 방법을 암시한다. 믹키는 온갖 더러운 방법으로 정글의 왕이 되었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현재의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은퇴를 고려하고 있으며, 영화의 제목처럼 신사다운 행동을 보인다. 단지 자신의 것을 노리는 자에게 잔인한 복수를 감행하지만 어차피 그건 남의 것을 탐한 자들이 먼저 잘못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그는 10년 후에는 합법화될 수도 있는 마리화나(대마초)만 취급한다. 비록 그는 나쁜 놈이 분명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용서 못 할 나쁜 놈은 아닌 셈이다. 물론 매튜 맥커너히의 매력도 한몫을 했음은 당연하다.
영화 속의 영화, 어차피 이건 현실이 아니잖아.
도덕성이 투철한 관객이라면 '그래봤자 믹키 피어슨은 악독한 마약상이잖아.'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매튜 맥커너히의 매력으로 포장되었고, 현재는 신사답게 행동을 하고 있어도 그는 마약이라는 불법적인 것을 거래해서 큰돈을 벌어들인 범죄자일 뿐이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다. 바로 영화 속의 영화이다.
플레처는 영화 제작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레이먼드에게 믹키의 비리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끼어 팔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플레처가 레이먼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치 영화처럼 표현되고, 영화의 마지막엔 속 편을 위한 열린 결말까지 거론된다. 이는 다시 말해 플레처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경계가 희미하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마리화나로 제국을 세운 정글의 왕 믹키 피어스의 이야기는 그저 플레처가 만들어낸 흥미로운 신화와도 같다. 이걸 현실에 반영해서 도덕성 운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이 리치 감독은 굉장히 영특하다. 그는 이 분야의 선구자답게 악독한 주인공을 내세워 매력적인 이야기로 관객을 영화 속에 끌어들인다. 골치 아프게 도덕성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어차피 현실의 이야기도 아니니까. 그냥 맘 편히 즐기면 된다. 이건 2천만 파운드에 거래될 뻔한 이야기란 말이다. 이 이야기에 거래된 거액의 금액만큼 재미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젠틀맨]은 충분히 2천만 파운드의 값어치를 지닐 만큼 재미있다. 2천만 파운드짜리 이야기를 단 돈 1만 원에 봤으니 엄청난 이익이다. 그러니 더욱더 [젠틀맨]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