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 명분 없는 전쟁의 큰 그림보다는 두 병사의 임무라는 작은 그림에서 감동을 찾다.
쭈니 2020.02.24 15:02:27
감독 : 샘 멘데스
주연 : 조지 맥케이, 딘-찰스 채프먼
코로나 19 확산되기 전에 극장에서 하얗게 불태웠다.
직장을 다니는 입장에서 주 중에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나처럼 결혼까지 했다면 더더욱 어렵다. 아무리 칼퇴근을 해도 저녁 6시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하지만 날라리 가장인 나는 지난주 중에 무려 네 편의 영화를 봤다. 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퇴근 후 극장을 찾은 셈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주말에 아들과 함께 극장에 갈 수 없으니 보고 싶은 기대작이 많이 쌓여 있었고, [1917]을 보려다가 실수로 [정직한 후보]를 봐야만 했던 목요일의 해프닝까지 겹치며 주중 네 편의 영화 관람이라는 내 인생의 기록이 달성되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지난주 중에 열심히 극장에 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에서 코로나 19를 일요일자로 심각 단계로 격상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코로나 19에 대해 큰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특정 종교에서 시작된 대량 확진자 발생 뉴스를 듣다 보니 나 역시도 살짝 두려워졌다. 어쩌면 이번 주부터는 코로나 19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극장 가기를 자제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래놓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또 극장으로 달려갈지도 모르지만...)
[작은 아씨들],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정직한 후보]에 이어 극장에서 하얗게 불태운 지난 주의 대미를 장식한 영화는 [1917]이다. 이 영화는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놓고 [기생충]과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친 영화로 촬영상, 음향믹싱상, 시각효과상까지 3개 부문을 수상했다. [기생충]의 갑작스러운 급부상으로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 수상을 눈앞에서 놓쳤지만 2019년 올해의 미국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종 미국 내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차지했다. 비록 전쟁 영화를 싫어하지만 [1917]을 봐야만 했던 이유이다.
큰 그림보다는 작은 그림을 잡아내다.
[1917]의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군 병사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에게 하나의 미션이 주어진다.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총공격을 나서려는 매켄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중령에게 공격을 중지하라는 에린무어(콜린 퍼스) 장군의 명령을 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쟁터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미션 완수 여부에 따라 1,600명의 아군과 블레이크의 형(리차드 매든)의 목숨이 달려 있다. 이에 두 병사는 죽기 살기로 미션 완수를 위해 달려 나간다.
어찌 보면 [1917]은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다. 영화는 아예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하여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만 뒤쫓는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마치 나 자신이 두 병사가 되어 전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만 같은 체험하게 된다. 이건 마치 전쟁이라는 큰 그림에는 관심이 없고, 두 병사의 미션이라는 작은 그림만을 그리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단순함이 이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을 빌미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며 시작되었고,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앞다퉈 참전하며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전쟁은 명분이 부족한, 그저 좀 더 많은 식민지를 얻으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욕심에 의한 전쟁이었다. 그렇기에 멋모르고 전쟁에 참전하여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임무 완수를 죽기 살기로 달리는 두 병사의 이야기가 이 명분 없는 전쟁의 큰 그림보다 더 내게 감동으로 다가온 것이다.
너무 긴장되어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비록 [1917]의 내용은 단순하지만 그것을 담아낸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긴장감이 넘쳤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편안하게 극장 좌석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비교적 안전한 영군군의 참호에 있을 때조차도 언제 독일군의 총탄이 날아올지 몰라서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면서 허리가 숙여졌다. (참호 안에서는 허리를 숙이고 걸어야 적군 저격수의 총을 피할 수가 있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어느 버려진 농가에 도착하는 장면에서는 한적한 그곳의 풍경과는 달리 갑자기 독일군이 튀어나올 것 같아 불안했다. 특히 농가에 도착한 스코필드가 '불길하다'라고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주인공의 그러한 대사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결국 스코필드의 예감대로 불길한 일이 벌어졌고, 이제 스코필드는 혼자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서 영화의 긴장감은 2배로 커진다.
긴장감이 최고조로 끌어올려진 것은 폐허가 된 마을에서 스코필드가 독일군 병사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장면이다. 이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스코필드는 독일군에 쫓기다가 지하에 숨어 있는 한 여성을 만나는데, 솔직한 내 심정은 스코필드가 미션을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 안전한 지하에 숨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독일군이 득실거리는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서 임무를 완수한다. 마지막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형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코끝이 찡해졌다. 스코필드는 목숨을 걸고 블레이크와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미션을 완수할 수 있었던 이유
결국 [1917]은 스코필드라는 전쟁 영웅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는 조국을 위해,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것은 아니다. 영화 초반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의 대화에서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에게 훈장을 와인과 바꿨다고 고백한다. 군인에게 있어서 훈장은 명예와도 같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그따위 명예보다는 와인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아무런 대가도 없는 이 임무를 목숨을 걸고 완수한 것일까?
처음 이 임무는 블레이크에게 주어진 것이다. 매켄지 중령이 이끄는 군대에 그의 형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되었을 것이다. 에린무어 장군은 자기 형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블레이크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코필드는 블레이크가 얼떨결에 선택한 동행자일뿐이다. (실제 영화 초반 스코필드는 왜 나를 선택했냐고 블레이크에게 투덜거린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그의 임무를 대신 짊어진다. 조국을 위해서도 아닌, 명예를 위해서도 아닌, 그저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서 그는 목숨을 건다. 그것밖에 죽은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스코필드의 이야기가 감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종식시키고, 인류의 평화를 지킨다는 거창한 목표 따위 그에겐 없다. 그저 자신 앞에 놓인 현실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는 세계 평화를 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무언가 하지는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내 삶에 충실할 뿐이다. [1917]은 스코필드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라는 큰 그림을 이루는 한 병사의 작은 그림 한 점을 보여줌으로써 나와 같은 평범한 소시민에게 공감을 안겨준 것이다.
전쟁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용기에 공감한다.
나는 아직도 전쟁은 우리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어떤 정의도 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전쟁 영화에서 적군을 많이 죽이고 영웅이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1917]도 마찬가지이다. 스코필드는 임무 완수를 위해 여러 명의 독일군을 죽인다. 버려진 농가에서 부상을 입은 독일 파일럿을 죽이고, 폐허가 된 마을에서 자신을 뒤쫓는 독일군 여럿을 죽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행위를 결코 영웅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그려낸다. 전쟁에 내던져진 그에겐 자신을 죽이려는 적군을 먼저 죽이는 것 외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1917]을 보며 스코필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이 벌어져 징집된다면 힘없는 나를 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에 끌려 나가면 그때부터는 살기 위해 나를 죽이려 하는 적군을 죽이는 것만 남는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기에 죄책감이 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스코필드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1917]은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독일군의 함정에 빠질뻔한 영국군 1,600명을 살려낸 영웅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저 앞으로 달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한 청년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그럼으로써 샘 멘데스 감독은 명분 없는 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된 수많은 이름 없는 병사들의 용기를 이야기한다. 영웅적일 필요는 없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그들의 용기를 말해주는 것이니까.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던(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 [1917]은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용기를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