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독 : 김용훈

주연 : 전도연, 정우성, 배성우, 정만식

​

​

큰돈을 훔칠 기회가 생긴다면...

​

​

아주 오래전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는데 사장님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만약 네 앞에 큰돈이 있고, 그것을 훔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돈이 내 인생을 다 바쳐도 될 만큼 큰돈이라면 고민을 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면접에 합격하기 위한 즉흥적인 대답이 아닌 내 진심이다. 남의 것에 손을 댄다는 것은 그만큼 큰 위험이 뒤따른다. 만약 나의 부정행위가 걸린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 감옥에 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내 인생은 끝장이 난 것과도 같다. 내 앞의 돈이 내 인생을 걸 만큼 가치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굳이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 끝장나면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눈앞의 돈가방 때문에 인생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명품 가방에 들어있는 5만 원짜리 돈뭉치는 기껏 해봐야 10억 정도 되어 보이는데, 과연 그 돈은 인생을 걸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솔직히 내가 돈가방을 발견했다면 그 돈으로 새 출발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 섞인 가능성보다는 그 돈이 내 인생을 끝장낼 수도 있다는 불안한 가능성을 먼저 감안하여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건 돈가방을 발견한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모두 하나같이 돈가방을 차지하려 하고, 급기야 돈가방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돈가방을 둘러싼 여러 캐릭터를 통해 이성은 마비되고, 그저 욕심에 의한 본능만 남아 버린, 그래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 군상들을 잡아내는 영화이다. 김용훈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여러 캐릭터들을 조율하고, 배우들은 스스로 망가짐을 각오하며 짐승이 되어가는 인간 군상을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우리나라의 웰메이드 하드보일드 스릴러 영화이다. (이후 스포 덩어리임)

​

​

​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돈가방이다.

​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처음부터 돈가방에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춘다. 한 남자가 가방을 들고 호텔 사우나에 들어가 락커에 가방을 넣는다. 그날 아침 호텔 사우나의 직원인 중만(배성우)은 청소를 하던 도중 락커에서 가방을 발견한다. 가방 안에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중만은 일단 가방을 분실물 창고에 보관한다. 중만을 쫓던 카메라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순자(윤여정) 때문에 고달픈 중만의 아내 영선(진경)을 포착하고, 영선이 청소부로 일하는 터미널로 자리를 옮긴다. 영선이 화장실 청소하는 사이 세관원인 태영(정우성)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곧이어 태영은 박사장(정만식)에게서 빚 독촉을 받게 된다. 카메라가 이리저리 영화 속 캐릭터들을 쫓는 사이 돈가방은 진득하게 주인을 기다린다. 그리고 중만이 분실물 창고에서 돈가방을 꺼내는 순간 영화는 본격적으로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짐승들의 아귀다툼을 담아낸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주연이 정우성, 전도연이라는 톱스타이기에 두 배우가 연기한 태영과 연희(전도연)를 중심으로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연희는 영화가 시작된지 한참 후에야 등장하고, 태영은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후반부에 어이없이 빠져 버린다. 태영과 연희는 그저 돈가방을 탐낸 짐승들 중 하나일 뿐, 딱히 주인공이라 할 수도 없다. 그들의 빈 공간은 돈가방을 탐내는 다른 짐승들이 채워나갈 뿐이다.

결국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돈가방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한 것도 돈가방이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차지하는 것도 돈가방이다. 캐릭터들은 그저 돈가방의 주위를 맴돌 뿐이다. 영화의 줄거리만 봐도 그렇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돈가방의 출처를 설명하는 내용이라면, 중후반부터는 돈가방의 최종 종착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과연 이 돈가방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 탐구하는 영화의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

연희의 등장으로 정리되는 사건의 시간적 순서

​

​

무려 여덟 명의 주요 캐릭터가 등장한다. 게다가 시간의 순서대로 편집되어 있지도 않았다. 처음엔 중만이 호텔 사우나에서 돈가방을 발견하는 장면과 태영이 박사장에게 빚독촉을 받는 장면이 같은 시간대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미란(신현빈)과 진태(정가람)의 등장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술집에서 일하는 미란은 중국에서 온 불법체류자 진태를 만난다. 미란에게 호감을 느낀 진태는 미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죽이자고 제안한다. 결국 남편의 사망보험금을 노린 미란은 진태와 함께 범행을 모의하지만 어이없게도 진태가 다른 남자를 죽이는 바람에 계획이 꼬여 버린다.

솔직히 미란과 진태가 돈가방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지만 미란이 일하는 술집 주인으로 연희가 등장하며 모든 것은 정리가 된다. 이전 장면에서 태영은 박사장에게 빚독촉을 받으며 연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소연했었다. 다시 말해 연희의 등장은 미란과 진태의 장면이 현재가 아닌 과거의 사건임을 드러낸 것이다. 진태의 어이없는 실수로 미란의 남편 살해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연희가 미란을 돕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철두철미한 연희의 계획 아래 미란의 남편 살해는 성공하고 미란은 거액의 사망 보험금을 받게 된다.

자, 돈가방의 출처가 밝혀졌다. 처음 돈가방의 주인은 미란이다. 하지만 곧바로 연희가 돈가방의 주인이 되고, 돈가방을 차지한 연희는 태영을 이용해 밀항을 시도하려다가 오히려 태영에게 뒤통수를 맞고 돈가방을 빼앗긴다. 연희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한 태영은 돈가방을 가지고 호텔 사우나에 간다. 그렇다. 영화의 첫 장면과 이제서야 연결되는 것이다. 사실 영화 초반 중만이 사우나 청소를 하는 장면에서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그 뉴스에 모든 힌트가 들어있다. 돈가방의 첫 주인인 미란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연희에게 돈가방을 빼앗은 태영은 어쩌다가 호텔 사우나 락커에 돈가방을 두고 사라졌는지...

​

​

​

돈가방을 차지하려는 짐승들의 아귀다툼

​

​

이제 돈가방의 주인을 정하는 최종 라운드만 남았다. 일단 돈가방을 차지한 주인은 중만이다. 하지만 상황은 중만에게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다. 비록 현재 돈가방의 주인은 중만이지만 돈가방을 노리는 박사장과 연희가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다. 우선 박사장이 가장 유리하다. 그는 게임으로 치면 파워가 만땅인 캐릭터로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한다. 연희는 파워는 약하지만 약삭빠른 두뇌 회전이 강점이다. 처음엔 박사장에 밀려 눈치만 보지만 마지막 순간 기회를 잡으면 언제든지 박사장의 뒤통수를 치고 돈가방을 들고 도망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돈가방은 느긋하게 누가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인지 가늠한다. 중만은 주인이 되기엔 너무 어리석다. 그리고 박사장과 연희가 주인이 되기엔 너무 사악하다. 마치 돈가방은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을 차지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듯이 돌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 돌발 상황은 치매에 걸린 중만의 어머니 순자의 손에서 완성된다. 박사장의 정체를 알아낸 것도 순자이고, 집에 불이 날 수 있게끔 가스레인지에 생선을 올려놓은 것도 순자이다. 비록 계획된 행동은 아니지만 오히려 계획되지 않았기에 그 여파는 막강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초, 중반은 돈가방의 출처를 시간적 순서와 상관없이 흥미진진하게 설명했고, 중, 후반에는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짐승들의 아귀다툼 속에 욕심에 눈이 먼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결국 그들은 10억이라는 돈 때문에 인생을 걸었고, 그 결말은 잔혹한 죽음뿐이다. 그러한 사이 돈가방은 마치 관객에게 '이래도 나를 가지고 싶어?'라고 묻는 듯했다.

​

​

​

원작과는 다른 결말, 그렇기에 불안하다.

​

​

이 영화의 원작인 소네 케이스케의 동명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소설을 읽은 이들의 글을 보면 원작에서는 아무도 돈가방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용훈 감독은 결말을 바꾸었다. 결국 연희의 손을 떠난 돈가방이 언제나처럼 터미널의 화장실 청소를 하던 영선의 손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 장면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돈가방을 둘러싼 짐승들의 아귀다툼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던 소시민 영선이 돈가방의 마지막에 주인으로 선택됨으로써 결국 착한 사람이 최종 승자라는 희망 섞인 해피엔딩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돈가방을 둘러싼 아귀다툼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중만도 영선처럼 그러했다. 사망보험금 10억을 받기 위해 미란과 진태가 살해 모의를 하고, 연희가 미란을 꼬드겨 남편을 살해하게 한 후 돈을 가로채고, 태영이 연희의 뒤통수를 쳐서 돈을 빼돌리는 순간에도 중만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돈가방은 중만의 것이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중만은 짐승들의 아귀다툼에 휘말린다.

영선도 그렇지 않을까? 돈가방을 락커에서 발견한 영선의 표정에서 중만이 보인 것은 비단 나뿐인가? 돈가방을 손에 쥔 영선은 또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될까? 영화가 끝나고 나는 착한 영선이 돈가방을 가지게 되었다는 안도보다는 돈가방을 차지한 영선이 또 다른 짐승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마음에 휩쓸렸다. 그렇기에 원작과는 다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결말이 나는 굉장히 의미 깊게 느껴졌다. 평범한 소시민인 우리들도 언제든지 욕심 때문에 이성이 마비된 짐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덕분에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게 더욱 깊은 여운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