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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래빗] - 소년의 천진난만함과 전쟁의 처참함, 그리고 아름다운 릴케의 시가 공존하는 영화
13  쭈니 2020.02.12 13:37:19
조회 165 댓글 0 신고

감독 : 타이카 와이티티

주연 :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 스칼렛 요한슨, 토마신 맥켄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고 나서 샘솟은 관람 욕구

2020년 2월 10일 월요일은 영화팬으로서 대단한 날이었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인 [기생충]이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 작품상을 수상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 영화는 노미네이트조차 되지 못했었는데, 단번에 최고의 영예까지 차지하니 마치 내 일처럼 흥분되었다. 회사에서 업무를 하며 인터넷 기사로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그날 밤에 녹화 중계된 아카데미 시상식을 새벽까지 시청하며 감격적인 순간을 직접 눈에 담아 두었다.

이렇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다 보니 아카데미 수상작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생충]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고 시각효과상, 음향믹싱상, 촬영상 3개 부문을 수상한 [1917]은 물론이고, 의상상을 수상한 [작은 아씨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주디], 분장상을 수상한 [밤쉘] 등 앞으로 개봉할 영화들은 아무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섭더라도 놓치지 않고 챙겨볼 생각이다. 하지만 음향편집상과 편집상을 수상한 [포드 V 페라리]는 극장 상영이 종료되어 아쉽게도 볼 수 없다. (2019년 극장에서 놓친 영화 중 가장 아쉬운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그중 각색상을 수상한 [조조 래빗]은 지난 수요일에 개봉해서 현재 상영 중인 영화이기에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는 와중에 서둘로 예매를 마쳤다. 상영관이 별로 없고, 그나마도 교차 상영이라 시간대도 애매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며 샘솟은 나의 관람 욕구는 그 어떤 장애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때 VVIP였지만 차등 가격제 도입 이후 정이 떨어져 몇 년째 발길을 끊어버린 CGV에서 그것도 퇴근 후 2시간 동안이나 근처 대형 서점에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 악조건을 견뎌내고 [조조 래빗] 관람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꼬마 나치의 이야기?

솔직히 나는 전쟁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2차 세계대전 소재의 영화는 될 수 있으면 꺼리는 편이다. 대부분의 전쟁 영화는 인간의 광기에서 비롯된 전쟁이라는 범죄를 영웅의 서사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오락화하는데 나는 그게 싫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벌인 유대인 대학살은 인간의 섬뜩한 광기가 극대화된 사건으로 나에겐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 더 무섭게 느껴진다.

문제는 [조조 래빗]이 2차 세계대전 중인 독일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는 점이다. 비록 정통 전쟁 영화는 아니지만 주인공인 10살 소년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자랑스러운 나치가 되어 괴물이 분명한 유대인을 죽이는 것이 장래 희망인 꼬마 나치이다. 게다가 그에겐 상상 속 친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이다. 아무리 철없는 10살 소년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 그러한 설정이 나에겐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갑자기 아카데미 수상작을 보고 싶다는 관람 욕구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극장 관람은 자연스럽게 패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암튼 나는 쓸데없는 열정에 휩싸여 [조조 래빗]을 보겠다며 화요일 저녁, 혼자 멍하니 극장 좌석에 앉았다.

일단 다행스럽게도 [조조 래빗]은 내가 꺼려 할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가장 섬뜩한 인간의 잔인한 광기가 발현되던 암흑의 시절을 조조의 천진난만함으로 표현한다. 유대인을 죽이고 히틀러의 개인 경호원이 되고 싶은 조조는 독일 소년단에 입단하지만 토끼를 죽이지 못해서 겁쟁이라 놀림을 당하게 된다.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의 응원 속에 심기일전하여 소년단 단장인 클렌젠도프(샘 록웰)의 수류탄을 멋지게 빼앗지만 수류탄 폭발 사고로 얼굴에 흉터만 남는다. 어찌 보면 굉장히 심각한 장면이지만 [조조 래빗]은 코믹하게 표현함으로써 소재의 무거움을 덜어낸다.

조조가 마주친 가장 위험한 친구

수류탄 자폭 사건으로 나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접어야 했던 조조에게 위험천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조조의 집 비밀공간에 엘사(토마신 맥켄지)가 숨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엘사가 무시무시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소년 나치단답게 조조는 용감하게 엘사와 맞서지만 엘사를 당해낼 수가 없다. 게다가 엘사는 자신이 집에 숨어 있음을 나치 비밀경찰에게 신고하면 조조는 물론 조조의 어머니인 로지(스칼렛 요한슨)가 자신을 숨겨줬다고 폭로하겠다며 협박한다. 조조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조조는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로 한다. 비록 엘사를 신고할 수는 없지만 엘사에게서 유대인에 대한 정보를 캐내서 책으로 만들어 히틀러에게 선물로 주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엘사에게 알아낸 유대인의 놀라운 비밀은 유대인은 텔레파시로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잠을 잘 땐 박쥐처럼 거꾸로 천장에 매달려서 자기도 하며, 성인이 되면 머리에 뿔이 난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를 놀리기 위한 엘사의 장난이지만 조조는 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렇게 조조와 엘사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조조의 상상 혹 친구인 히틀러는 조조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급기야 조조는 목욕을 마치고 나온 엘사의 뽀사시한 모습에 심쿵하며 첫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나치 비밀경찰이 조조의 집을 불심검문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조조는 엘사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다. 어느덧 엘사는 가장 위험한 침입자에서 광기의 시대에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된 것이다.

아무리 코미디로 포장해도 어쩔 수 없는 암흑의 시기

[조조 래빗]은 조조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조조의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의 과장된 액션으로 관객을 웃음 속으로 끌어들인다. 유대인은 사람이 아닌 머리에 뿔이 난 괴물이라 믿는 조조의 모습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의 명분을 위한 나치의 선동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지금 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선동에 넘어간 무지한 사람들이 어이없게 느껴지지만 아마도 당시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히틀러의 선동에 동조하며 거짓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 것이리라. 조조만 하더라도 엘사는 죽은 누나의 친구이다. 하지만 히틀러를 존경하는 조조는 처음엔 엘사를 기억 속에서 지우며 그저 괴물 유대인이라는 히틀러가 만들어낸 허상만 믿을 뿐이다. 그땐 그랬다.

코미디로 포장된 이 영화는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그 본색을 드러낸다. 그저 자상한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던 로지가 거리에 평화를 요구하는 전단지를 몰래 유포하는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의 비극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조조는 단지 평화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개 처형된 어머니와 마주하게 된다. 히틀러가 만들어낸 허상을 쫓았던 조조가 처음으로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 순간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급변한다. 마치 '내가 언제 코미디였냐?'라고 반문하듯이 영화는 전쟁의 포염 속에 조조를 던져 놓는다. 전쟁은 여자라고, 어리다고 봐주지 않는다. 빗발치는 총탄과 화염 속에서 겁에 질려 도망치는 조조의 모습을 통해 [조조 래빗]은 그제서야 숨겼던 영화의 본질을 꺼내 든다. 전쟁은 영화 초반 조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 신나는 놀이가 아니었음을... 전쟁은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음으로 몰아넣는 끔찍한 범죄 행위임을 깨달으며 조조는 한층 성장하게 된다.

릴케의 시처럼 아름다운 영화

[조조 래빗]의 초반은 조조의 천진난만함이 가져다주는 코믹함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가 되면 전쟁의 처참함이 드러나며 이 영화가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그러나 전쟁의 처참함이 한바탕 지나고 나면 그 뒤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움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조조를 위해 희생하는 클렌젠도프의 모습을 통해 유대인이 괴물이 아니었듯이 나치 또한 괴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연합군의 승리로 이제 엘사는 조조의 집에서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엘사가 조조의 곁을 떠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나도, 아빠도, 그리고 엄마마저 조조를 떠났다. 그들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이제 조조에게 남은 것은 엘사뿐이다. 그런데 이제 엘사마저 떠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만 하더라도 유대인을 죽이고 히틀러의 개인 경호원이 되는 것이 꿈이라던 조조는 이제 엘사가 자신의 곁에 남아있기만을 원한다. 그래서 엘사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것이 10살 소년이 생각해낸 엘사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사와 조조는 거리에서 춤을 춘다. 이 참혹한 전쟁은 끝이 났지만 조조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춤을 춘다. 그리고 그 춤은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소개된 릴케의 시처럼 아름답다. 삶이 때론 웃기고, 슬프고, 무섭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던가. 타이카 와이키키 감독은 [조조 래빗]을 통해 관객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속삭인다.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경험하라.

계속 걸어가라.

감정에 이르지 못할 곳이란 없으니...

-라이너 마리아 릴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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