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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정혁기

주연 : 엄태구, 이혜리, 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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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최고의 화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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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나는 아들과 함께 [자전차왕 엄복동]을 보기 위해 열심히 아들을 설득했었다. 하지만 아들은 영화에 대한 형편없는 평점을 들먹이며 [자전차왕 엄복동] 보기를 거부했다. 나는 보지도 않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선입견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자전차왕 엄복동]은 나 혼자 봐야 했다. 그리고 아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전차와 엄복동]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새로운 문제작이 개봉했으니 그 주인공이 바로 [판소리 복서]이다. 나는 [판소리 복서]를 극장에서 기대작으로 선정해 놓고 아들과 함께 보려고 또다시 아들 설득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들은 완강했다. 나한테 '도대체 판소리와 복싱이 혼합된 영화를 뭐 하러 보려 하냐?'라며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끈질겼다. 하지만 아들도 끈질겼다. 아들은 12월 32일에 보겠다는 둥, 2222년 2월 22일 22시 22분 22초에 보겠다는 둥,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결국 [자전차왕 엄복동]이 그러했듯이 [판소리 복서]도 나 혼자 봐야 했다. 그것도 [좀비랜드 : 더블 탭]과 [데드 돈 다이]라는 두 편의 좀비 영화를 본 후... 그런데 [판소리 복서]를 보고 나니 공포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판소리 복서]가 가장 무서웠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이 세상에 재미없는 영화만큼 (다른 의미에서) 무서운 것은 없다. 안타깝게도 [자전차왕 엄복동]에 이어 또다시 아들의 선택이 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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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와 복싱... 어울리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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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도 [판소리 복서]를 보러 가자고 조르자 아들이 내게 물었었다. 도대체 왜 이 영화를 보려고 하느냐고... 내가 [판소리 복서]를 보고 싶어 한 이유는 판소리와 복싱이라는 낯선 조합 때문이다. 잊혀가는 우리의 문화 판소리와, 헝그리 정신으로 대변되는 배고픈 시절 최고의 스포츠 복싱, 이 두 가지는 요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것들이다. [판소리 복서]는 이렇게 점점 젊은 세대의 관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낡은 것들을 한데 뭉쳐서 '판소리 복싱'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스포츠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결과물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불안해졌다. [판소리 복서]는 오프닝에서부터 일몰(혹은 일출)의 바닷가에서 판소리와 복싱이 한데 어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만약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이 장면만으로 '우와 멋있다.'라는 감탄사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감탄사 대신 '이거 어색한데...'라는 불안감이 나를 감쌌다.

그렇다. [판소리 복서]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판소리와 복싱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판소리와 복싱의 조화이지만, 결국 이 영화가 혹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판소리와 복싱의 부조화 때문이다. 정혁기 감독은 판소리와 복싱을 조화롭게 보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택하거나, 아니면 판소리와 복싱을 같이 붙여 놓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어색한 결과물을 낼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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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착한 게 아니고 바보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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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복서]에서 정작 '판소리 복싱'은 오프닝에 잠깐 나오고 1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대신 불새 체육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병구(엄태구)를 보여준다. 병구의 상황은 최악이다. 복싱으로 인한 뇌 손상으로 펀치 드렁크 진단을 받았다. 그의 펀치 드렁크는 마치 치매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데, 영화에서 병구가 약간 모자라 보이는 이유는 펀치 드렁크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는 무릎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먹고 경기에 나섰다가 금지 약물에 걸려 권투 협회에 영구 제명된 상태이다. 펀치 드렁크에 영구 제명까지... 하지만 그는 권투 선수로서의 마지막 재기를 꿈꾼다. 스스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화는 신입 관원인 민지(이혜리)를 등장시켜 병구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안겨준다. 민지는 병구에게 '착하다'라며 좋아한다고 고백하지만 영화 속의 병구는 착하기보다는 그냥 바보처럼 보일 뿐이다. 영화 속 민지의 고백처럼 그녀는 참 남자 보는 눈이 없다. 결국 병구는 꿈에도 그러던 권투 시합에 출전할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은 박관장(김희원)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바보는 주위 사람도 힘들게 한다. 병구라는 바보 같은 캐릭터에 엄태구의 낮은 목소리를 입혀 놓으니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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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같은 주먹 병구 주먹, 천둥같은 장단 민지 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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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기 감독은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주입시키는데, 병구의 옛 친구이자 병구를 '판소리 복싱'의 길로 인도한 지연(이설)은 영화 내내 하얀 한복에 장구를 매고 다닌다. 판소리를 하는 사람은 한복만 입어야 한다는 정혁기 감독의 선입견 때문일까? 아니면 병구의 기억 속 민지의 왜곡된 모습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얀 한복에 장구를 어깨에 맨 지연이 등장은 이 영화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닐까?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에선 판소리가 마치 뮤지컬처럼 상황을 설명을 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20년 전 봤던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춘향뎐]에서는 영화 속 장면과 찰떡같이 어울렸던 판소리가 [판소리 복서]에서는 정말로 많이, 아니 엄청나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판소리 복서]의 역대급 장면은 역시 병구가 박관장의 희생으로 신인왕전에 나가는 장면이다. 경기에서 병구는 한때 체육관 동료였던 교환(최준영)에게 죽도록 얻어터진다. 하지만 복싱 영화라는 것이 항상 그러하듯이 민지가 체육관에 도착하자 반전이 일어난다. 민지는 갑자기 체육관에 앉아 장구를 치기 시작하고, 민지의 장구 소리에 맞춰 병구는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판소리 복싱'을 선보인다. 이 장면... 이거 꼭 봐야 한다. 얼마나 웃기던지... 영화가 끝나고 '번개같은 주먹 병구 주먹, 천둥같은 장단 민지 장단'은 오랫동안 기억에 맴돌았다. 어이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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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어이없는 웃음을 안겨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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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들에게 결국 [판소리 복서]를 혼자 봤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들은 드디어 [판소리 복서]에게 해방되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이 어이없는 영화를 나 혼자만 보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2분만 보라고... 아들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더도 덜도 말고 딱 2분을 보기로 했다.

설거지를 하던 아내까지 소파에 앉았고, TV에서는 [판소리 복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신인왕전에서 민지가 갑자기 들어와 장구를 치고, 병구가 '판소리 복싱'을 하는 장면이 상영되었다. 그 짧은 2분 동안 아들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쓰러졌고, 아내는 '시합 도중 저래도 돼?'라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게 [판소리 복서]의 현실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들은 유튜브를 검색하더니 '번개같은 주먹 병구 주먹 천둥같은 가락 민지 가락'이 무한 반복되는 동영상을 찾아냈다. 그렇게 [판소리 복서]는 우리 가족에게 웃음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이없음에 대한 비웃음이니 [판소리 복서]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씁쓸하기만 했다. 앞으로 과연 [판소리 복서]만큼 어이없는 영화를 찾을 수 있을까? 한동안 불가능하지 않을까? [판소리 복서]의 리뷰를 쓰고 나면 그냥 이 영화를 영원히 잊고 싶다. 그런데 어쩌지? 자꾸 '번개같은 주먹 병구 주먹 천둥같은 장단 민지 장단'이 귓속을 맴돈다. 미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