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를 넘어 들판에 서다
enterskorea 2020.01.20 10:58:13
전성기를 넘어 들판에 서다
바깥에는 낯선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란과 곡절이 많았다 해도 회사에서의 일상은 온실 속이었다는 걸 직감했다. 내가 서 있는 들에서는 GPS도 내비게이션도 작동하지 않았다. 어떤 길로 가야 할지 헤매다가, 작은 터를 잡고 일을 시작했다.
할 줄 아는 게 다큐멘터리나 다른 영상콘텐츠 만들기 말고는 없었다. 1인 사업체였다. 조직과 시스템의 지원을 받는 데 익숙했던 내게는 혼자서 척척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별로 없었다. 들판에 나와서야 조직의 힘을 알게 된 거다. 추진하던 것들이 뜻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두 개를 벌이면 하나는 걸릴 줄 알았다. 뭘 모르시는 군, 청년 시절부터 이쪽 사업을 해온 지이니 그런 표정으로 말했다. “열 개를 던져서 한두 개 걸리면 성공이에요.”
(故이용마 기자(왼쪽)와 문재인 대통령 / 사진=이용마 기자 페이스북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417&aid=0000440796)
어느 날 반가운 얼굴이 문을 두드렸다. 해직된 후배 이용마 기자였다. 연락도 못 해서 궁금하고 미안하던 참인데 그는 내 안부를 먼저 물었다.
“어떻게, 잘 되세요?”
“나야 뭐 그냥 그래”
“저는 박사과정을 막 끝냈어요.”
“근데 왜 그렇게 배가 많이 나왔니?”
“운동을 너무 안 해서 그래요.”
배가 이상하게 불렀던 게 복막암이라는 희소병 때문이란 걸, 그때는 둘 다 모르고 있었다. 그는 2017년 겨울, 휠체어를 타고 회사로 돌아갔다. 5년 7개월만의 복직이었다.
(故이용마 기자 시민사회장 /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06&aid=0000098403 )
그리고 2019년 여름. 부음이 왔다. 임종을 지켜본 후배는 용마가 눈을 채 감지 못했다고 했다. 집으로 가면서, 타오르다가 꺼지고 만 그의 쉰 살 인생을 생각했다. 상가에 함께 있던 나의 벗, 김평호 교수가 다음 날 아침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내 느낌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사람은 죽음을 쉽게 잊도록 짜인 것인가. 망자에 대한 그리움, 유족에 대한 미안함, 그를 박해한 자들에 대한 분노. 그러다 문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밀리는 차, 내리는 비, 열기와 습기에 짜증내는 자, 나의 이 적나라한 졸렬함을 본다.
퇴직하고 1년이 지난 2016년 겨울, 촛불을 치켜든 분노의 함성이 광화문 광장을 흔들었다. 탄핵과 구속, 국정농단에 대한 단죄가 이어지자 회사를 만신창이로 만든 자들도 퇴각했다. 너무 오래 신음하던 회사는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대야 할 지경이었다. 누구도 관심이 없는 매체가 되어있었다.
나는 2017년 11월, 새로운 사장을 뽑는 공모에 지원했다. 가장 큰 과제였던 적폐청산과 나름의 혁신방안을 들고 나갔다. 세 명의 최종 후보에 선정돼 정책을 발표할 기회도 얻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새 사장과 모든 구성원이 팔을 걷고 폐허 속의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집을 짓기에는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했다.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 길을 멀고 험해 보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닐 영의 노래가 좋다. <사방의 세찬 바람 Four Strong Winds>이 어떨까 싶다.
사방에서 쓸쓸히 부는 세찬 바람,
대양의 물결이 거셀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바뀌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좋은 시절이 다 가버렸다면,
다른 곳을 향해서 떠나가야지.
닐 영은 바람 속에서 관조를 노래하고 있다. 관조觀照. 사전의 뜻풀이는 이렇다.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본다.’ 퇴직한 뒤 지리산 자락에서 글 쓰며 10년째 혼자 지내는 선배는 내게 ‘마음 챙김’을 얘기해주곤 한다. ‘지금, 여기’를 사는 지혜를 일컫는 말이다. 나는 오늘 마음을 잘 챙기고 있거나,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가. 이따금 마음의 흔들림을 느낄 때, 관조라는 말을 쉽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하얀 바닥이 보이는 얕은 물가에 앉아있다. 살면서 어두운 바람이 불고 물결이 거셀 때가 있었다. 나를 잃고 찾는 날이 반복되기도 했다. 그래도 깊고 푸른 물속을 이리저리 유영할 때가 그립다. 아직도 바람이 불면 마음이 일렁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