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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전성기, '2580'에서 걷던 길
8  enterskorea 2020.01.13 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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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전성기, 2580에서 걷던 길





나는 통념을 벗어난 기자의 길을 걸었다. 346개월에 이르는 방송기자 경력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대목이 있다. 내가 출입했던 기관, 즉 출입처가 딱 두 군데뿐이다. 그 기간도 1990년을 전후로 2년 남짓이다. 어쨌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출입처였던 환경처 근무 이후 나는 짧은 뉴스가 아닌, 긴 콘텐츠를 만드는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내가 다큐멘터리에 탐닉하게 된 데에는 두 선배 기자의 영향이 컸다. 제작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김종오, 김승한 선배. 섬세한 감성에서 우러난 필력과 깊은 통찰로 다큐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분들이다. 그런 선배들이 축적한 자산을 기반으로 시사매거진 2580이란 새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내가 꿈꾸던 이상향이었다. 전성기가 언제냐 묻는다면 2580깃발을 꽂은 94년부터다.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던 그때, 제작을 지휘했던 부장이 김종오 선배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그가 2580이 출범할 때를 회고한 글이다.

    

 

일요일 방송을 가까이 앞두고 밤샘하던 누구들 책걸상 위 맨발과 양말과 라면과 담배는 그러나 제목 없는 정물화처럼 지금도 깊숙한 여운을 불러일으킵니다. 2580이 걷고자 했던 길은, 쉽고 조용하게 다가와 세상을 깊게 이르고 그리고는 작은 걸음으로 흥을 내어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_ 2580방송 10주년 기념문집 중에서, 20049.


 


이 글에는 프로그램이 추구했던 특성과 색조, 정서와 리듬이 들어있다. 그때 제작진의 숙제는 기존의 시사 고발 프로와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달라야 하는 그 뭔가는 도대체 뭔가. 제작진은 토론을 거듭한 2580의 가이드라인과 기본 레시피를 도출했다.

 

강력하면서 실험적인 기법의 고발, 약자들의 고난과 그 뒤에 숨은 부조리 추적,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세태와 풍속 스케치. 그런 이야기들로 하드와 소프트를 적절히 배합한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하드보일드와 스릴러, 사회성 짙은 느와르,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장르를 다 녹여 보자는 것이었다.



 


94227일 밤 930, 사무실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다들 가슴 졸인 가운데 첫 방송을 내보냈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뭔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시청률은 24%. 같은 시간대 1위는 물론, 인기드라마와 거의 맞먹는 수치였다. 그 후로 30%를 가끔 넘어가면서, 장르를 통틀어 주간 시청률 베스트 10’에 여러 번 올랐다. 신문의 방송 비평에서는 아주 새로운 시사 프로그램의 탄생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지금도 난, 그때 시청자의 마음을 끌어당긴 힘이 뭔지 잘 짚어내지 못하겠다. 다만, 다른 시사프로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던 건 분명하다.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라는 메시지를, 짧은 영화처럼 감동적인 서사로 빚어낸 이야기가 많았다.

 




토요일 밤, 녹화 스튜디오는 늘 북적거렸다. 그 주간의 담당이 아닌 동료들도 남아있었는데 끝나면 같이 한잔할 요량이었다. 호프집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파랗게 동트는 포장마차에서 파하곤 했다. 메리 홉킨의 노래 <그 옛날이 좋았지 Those were the days>에는, 밤을 지새우게 했던 우리들의 열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그 옛날, 선술집이 있었지.

우리가 술잔을 들고 부딪치던 거기.

웃고 떠들던 그때를 기억하나.

성취했던 좋은 일들을 생각해 보게.

우린 세상과 싸웠고 진 적이 없었어.

젊고 확신에 차 있었지.

친구여, 참 좋은 시절이었네.

그런 날이 끝없이 갈 줄 알았어.

 

시사매거진 2580은 사라진 프로그램이다. 어쩔 수 없이 수명을 다한 것 같았다. ‘세상을 깊게 이르고, 작은 걸음으로 흥을 내어 돌아갈여유가 없는 시대엔 맞지 않아 보인다. 씁쓸해도 그게 현실이다. 끝없이 갈 수 없었던 좋은 시절24년을 함께한 제작진에게 많은 추억과 그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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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우호 씨가 마주친 세상 <이우호> 저

시간여행, 2019년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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