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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정지영

주연 : 조진웅, 이하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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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심 끝에 고른 첫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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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덜컥 연차휴가를 내버렸다. 바쁜 월말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휴가를 내는 바람에 혼자만 바쁘게 일을 하다가 상사 눈치 보며 휴가도 못내는 나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 까짓것 나도 쉬자.'라는 심정으로 휴가계를 내긴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왕 휴가계를 냈으니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보지 못한 영화나 실컷 보자고 결심했다.

봐야 할 영화가 꽤 많았다. [나를 찾아줘], [크롤], [허슬러], [결혼 이야기], [아이리시맨], [블랙머니]까지... 보고 싶은 영화를 나열해보니 하루 가지고는 턱도 없다. 그래서 가장 보고 싶은 영화를 먼저 골랐다. [나를 찾아줘]와 [아이리시맨]. 문제는 [아이리시맨]의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 30분이라서 [아이리시맨]을 보면 리스트에 넣고 보니 하루 동안 볼 수 있는 영화는 세 편으로 줄어들었다. [나를 찾아줘]와 [아이리시맨]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남은 한 편만 고르면 된다. [크롤], [허슬러], [결혼 이야기], [블랙머니]. 이 중에서 단 한 편만이 나와 꿀맛 같은 연차휴가를 함께 보낼 수가 있다.

처음엔 [허슬러]였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 않더라. 그래서 [허슬러] 예매를 취소하고 [결혼 이야기]로 바꾸었다. 그런데 [결혼 이야기]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더라. 그래서 다시 예매를 취소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된 영화는 개봉한지 가장 오래된 [블랙머니]이다. 개봉한지 3주 차가 되었음에도 아직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평이 좋다는 것이 내 선택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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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 사건을 소재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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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머니]가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IMF 당시 외환위기로 휘청이는 한국에서 부실채권에 투자하며 큰 시세 차익을 맛본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다음 타깃으로 삼는다. 당시 외환은행은 BIS비율이 8% 아래로 떨어지며 부실 논란에 휩싸였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것이다. 하지만 외환은행의 BIS 조작, 고위 경제관료 로비 등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는 뒷말이 무성했다.

결국 사단은 2012년 론스타가 천문학적인 시세차익을 남기고 외환은행을 하나금융에 팔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론스타가 먹튀라는 비난 여론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론스타는 IMF로 인하여 상처투성이였던 한국에서 단물 쪽 빨아먹고 몇 조원의 이익을 남기며 유유히 떠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한국 정부에 46억 7950만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걸었다. 론스타는 이미 2006년 KB금융지주와 2007년 HSBC에 외환은행 주식을 매각하려 했으니 한국 정부가 매각 승인을 늦춰 손해를 봤다는 주장이다. 이 소송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블랙머니]가 주목한 것은 어떻게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느냐이다. [블랙머니]는 론스타를 스타펀드로, 외환은행을 대한은행으로 바꾸어 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사건을 차근차근 되짚어 본다. 그렇다고 해서 무겁고 딱딱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정지영 감독은 관객이 좋아할 만한 꼴통 검사 양민혁(조진웅)을 내세워 영화적 재미를 구축한 후 그 안에 론스타 먹튀 사건의 진실을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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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누명을 벗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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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은 대한은행 BIS 조작을 주도한 금융감독원의 최차장(류승수)과 대한은행의 박수경(이나라)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다. 검찰 조사를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교통사고로 최차장은 즉사하고 박수경은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자신도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박수경은 겁에 질린다. 그리고 며칠 후 박수경은 차 안에서 자살한 채 발견된다. 그녀의 유서엔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담겨 있다.

졸지에 성추행 검사로 낙인찍힌 양민혁은 누명을 벗겠다며 박수경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박수경의 죽음이 스타펀드의 대한은행 헐값 인수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미 대한은행 헐값 인수 사건은 중수부에서 수사 중이지만 양민혁은 내 누명은 내가 벗겠다는 사명 아래 좌충우돌 대한은행 헐값 인수 사건에 연루된 고위 관료층을 캐고 다닌다.

물론 양민혁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하지만 어쩌면 딱딱할 수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윗분 눈치 안 보고 달려드는 꼴통 검사는 언제나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스타펀드측 변호사인 국제통상 전문가 김나리(이하늬)가 양민혁과 의기투합한다. 일단 그림이 된다.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김나리. 처음엔 스타펀드 변호사로 사건에 개입하지만 점차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며 양민혁과 힘을 합치게 된다는 설정이다. 너무 뻔하다고? 그래, 뻔하다. 하지만 이 조합은 거의 무적이다. 그렇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마음 편하게 양민혁과 김나리를 응원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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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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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도 만만하지 않다. 그들은 스타펀드 사건에 의욕을 보인 신임 검찰총장 최용욱(이성민)을 단번에 날려 버릴 정도로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대한은행 BIS 조작의 결정적인 증인이었던 최차장과 박수경이 사고사, 자살로 위장되어 죽임을 당했고, 좌충우돌 들쑤시고 다니던 양민혁과 장수사관(강신일)도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다. 그들은 한국 경제를 주무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이용하여 막대한 부와 명예를 독차지하고 있다.

그에 비한다면 일개 평검사에 불과한 양민혁과 김나리가 가진 힘을 너무 미천하다.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고, 그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 하지만 영화라면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가 아니던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판타지에 대한 대리 만족. 우리는 이미 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 사건의 결말을 알고 있지만 꼴통 검사 양민혁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김나리의 활약을 기대하게 된다. 우리에게 속 시원한 사이다를 안겨줄 것이라는...

[블랙머니]의 장점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면 고구마를 먹는 듯한 가슴이 답답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어쩌면 차라리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드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블랙머니]는 상업 영화이고, 영화적 재미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 노련한 정지영 감독은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었고, 양민혁과 김나리를 내세워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통쾌함을 선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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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패배의 쓴맛을 맛본다. (이후 스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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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는 끝났다. 비록 중수부장인 김남규(조한철)가 검찰총장 자리가 탐이 나서 이광주(이경영)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아직 우리에겐 양민혁과 김나리가 있다. 김나리를 이광주의 든든한 빽 덕분에 금융위원회 위원이 된다. 그가 스타펀드의 주식 매각을 단순 매각이 아닌 징벌적 매각 결정을 내린다면 스타펀드에 타격을 입힐 수 있으며 그때 양민혁이 몰래 빼돌린 증거를 공개하면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다. 비록 현실에선 론스타에 완벽하게 패했지만 영화에서만큼은 통쾌하게 스타펀드에 한 방을 날릴 수도 있다.

그러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순간 김나리는 아버지(남명렬)의 전화를 받는다. 스타펀드에 들어간 투자금 일부가 그녀의 집안 돈이었던 것이다. 순간 정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 같았던 김나리의 눈 빛이 흔들린다. 그리고 우리는 배신을 당한다. 김나리를 향한 양민혁의 처절한 외침이 내 마음속에도 울려 퍼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정말 정지영 감독은 무서울 정도로 능수능란하다. 론스타 사건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영화 속에 이루어 놓았고, 양민혁과 김나리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통해 영화적 재미를 완성했다. 하지만 마지막 김나리의 배신으로 현실의 론스타 사건의 결말을 고스란히 따르며 여운을 안긴다. 양민혁이 증거 서류를 사람들에게 뿌리며 아무리 외쳐도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영화에서조차 우리는 그들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한 씁쓸함은 [블랙머니]의 힘이다. 더 이상 당하지 않으려면 영화 속 말랑말랑한 판타지에 만족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정지영 감독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참... 정지영 감독다운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