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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캐린 쿠사마

주연 : 니콜 키드먼, 세바스찬 스탠, 토비 켑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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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의 변신은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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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에 개봉한 한 편의 영화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디스크로이어]라는 낯선 제목의 영화인데 이 영화가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는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니콜 키드먼의 모습이 내가 알던 아름다운 그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영화의 스틸 사진은 더욱 충격적이었는데, 니콜 키드먼은 [디스트로이어]를 통해 철저하게 망가지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사실 니콜 키드먼의 변신은 처음이 아니다. 국내에선 2003년에 개봉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은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하며 파격적인 외모 변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신 덕분에 니콜 키드먼은 제75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디스트로이어]는 [디 아워스]보다 변신의 폭이 훨씬 크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국내에선 2004년에 개봉한 패티 젠킨스 감독의 [몬스터]에서 샤를리즈 테른이 연기한 여성 연쇄살인마 에일린을 보는 것만 같았다. 흥미롭게도 샤를리즈 테른은 니콜 키드먼이 [디 아워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음 해에 [몬스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미국 아카데미는 여배우의 변신을 참 좋아한다. 어쩌면 니콜 키드먼 역시 [디스트로이어]의 출연을 결정하며 아카데미에 대한 기대가 살짝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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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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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로이어]의 내용은 범죄조직 잠입수사 중 동료이자 연인인 크리스(세바스찬 스탠)를 잃은 경찰 에린(니콜 키드먼)의 복수극이다. 영화는 에린이 어느 범죄조직원의 살해 현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담당 형사는 에린이 끼어드는 것이 탐탁지 않았는지 '이건 우리 사건이야.'라며 경계를 한다. 그런 동료 형사에게 에린은 '내가 범인을 안다면?'이라는 한마디만 내뱉고 사라진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보라색 잉크가 묻은 100달러짜리 지폐. 그리고 그와 똑같은 지폐가 에린에게 배달된다. 마치 도전장을 내밀듯이... 이에 에린은 17년 전 악몽과도 같았던 사건을 회상한다. 사일러스(토비 캠벨)가 이끄는 범죄 조직에 잠입했던 나날들... 그녀는 17년 동안 잠적했던 사일러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수를 위해 그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17년 전 과거의 사건과 현재 사일러스를 추격하는 에린의 모습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그러면서 왜 에린이 그토록 사일러스 사건에 집착하는지 천천히 설명한다. 사일러스를 잡기 위해 사일러스의 조직원이었던 옛 동료(?)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에린. 그런데 에린의 모습이 애처롭다. 복수는커녕 제 한 몸 가눌 힘도 없어 보인다. 과연 그녀는 17년을 기다려온 복수를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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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지 않고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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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복수극이라면 영화 자체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이 정상이다. 주인공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복수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를 한 후 마지막에 가서 폭발하듯 복수를 실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난 4월 개봉한 피에르 모렐 감독의 [아이 엠 마더]가 그런 식이다.

하지만 [디스트로이어]는 다르다. 이 영화는 뜨겁지 않고 오히려 차갑다. 에린은 사일러스의 행적을 쫓아 옛 동료들을 찾아가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범죄자의 자위행위를 도와주기도 하고, 급기야 죽도록 얻어터지기까지 한다. 그녀가 총을 들고 위협을 해도 모두가 코웃음만 친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경찰 따위를 우리가 무서워할 줄 알았냐'라는 비아냥만 돌아온다.

사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에린을 증오하고, 미성년자이면서도 대놓고 반항을 한다. 딸의 쓰레기 남자친구는 에린의 돈을 뜯어가기까지 한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이 엠 마더]의 라일리(제니퍼 가너)처럼 복수를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에린은 오히려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벼랑 끝까지 망가진 상태이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사일러스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마다 오히려 불안해지는 이유이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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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짜 맞춰지는 퍼즐 (스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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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너무 나약해 보였기 때문일까? 사일러스는 에린을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긴 애초에 에린에게 보라색 잉크가 묻은 100달러짜리 지폐를 보내며 겁을 줬던 사일러스가 복수심에 불타는 에린이 나타났다고 해서 벌벌 떨 이유가 전혀 없긴 하다. 아마도 그는 숨어살면서 17년 동안 에린이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며, 100달러짜리 지폐를 보내면 그녀가 17년 전의 악몽을 기억하고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방심하고 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을까? 아니면 사일러스를 추적하며 예전의 본능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걸까? 사일러스를 발견한 에린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영화는 첫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렇다. 영화 첫 장면에서 살해당한 범죄조직 조직원은 바로 사일러스이다. 그러고 보니 에린을 동료 경찰에게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했었다. 당연하다. 그녀가 범인이니까. 살해 현장에 있던 보라색 잉크가 묻은 100달러짜리 지폐는 그녀가 사일러스에게 받은 것을 사일러스를 죽인 후 현장에 내버려 둔 것이다.

솔직히 [디스트로이어]를 재미있는 영화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영화는 차가워도 너무 차갑다. 조금 뜨거울 법도 한데 캐린 쿠사마 감독은 영화의 무미건조함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러한 연출이 의외로 좋다. 특히 니콜 키드먼의 불안해 보이는 에린 연기는 차갑고 무미건조한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첫 장면을 마지막 장면과 연결하는 장치도 꽤 좋았다. 그저 멍하니 에린의 차가운 복수를 따라가다가 의외의 반전을 맞이한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러한 인상 깊은 몇 가지 요인 덕분에 [디스트로이어]는 내게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