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서 만난 세상 “소송하느라 힘드시지요?”

판결을 선고하는 법정에선 다양한 표정을 만날 수 있다. 판결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떠는 피고인, 분노에 가득 차 피고인을 쏘아보는 피해자와 그 가족, 안타까움에 숨죽여 흐느끼는 피고인의 가족,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판사의 무표정한 얼굴까지 여러 얼굴이 함께 한다. 각양각색의 감정과 표정만큼이나 판결 선고 후 피고인의 행동도 천태망상이다.

판결이 끝나면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이가 있는 한편, 마치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것처럼 절망감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이도 있다. 또 판결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원망하고 판사를 비난하며 거칠게 항의하기도 하고, 승복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어질 형벌의 시간이 두려운 피고인은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심지어 피고인이 자해를 하거나 법정에서 도주를 시도하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날엔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법정을 나가면서 철문을 머리로 들이받으며 소리를 지른 일이 있었다. 당시 그 모습을 지켜본 배석판사로서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피고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당연히 감치시키거나 법정에서 행패 부린 사실을 조서에 기록해 항소심에서 선처 받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 재판장이었던 분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피고인을 법대 앞으로 다시 불렀다. 그리곤 “지금 이 판결에 승복하지 못하신다는 의미입니까?” 하고 물었다. 피고인은 대답 대신 원망 가득한 눈길로 재판장을 쏘아보았다. 재판장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말씀을 이어가셨다.

“판사는 사건 현장에 직접 있지 않았으므로 수사기록과 증인신문 등 여러 증거를 종합해 공소사실의 진위를 판단할 수밖에 없어요. 그 결과 우리는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했고요. 깊이 고민한 결과이긴 하지만 우리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꼭 항소해 항소심에서 충실히 변론하고 다시 판결을 받아보세요.”

법정에서 소란을 피운 피고인에게 당연히 야단을 치고 벌을 내릴 거라 짐작한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재판장의 모습은 내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고, 내가 판사로 근무하는 동안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그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재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래 재판은 진실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판결을 통해 분쟁 당사자들이 다툼을 끝내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재판이 분란을 가중하기도 한다. 대화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문제도 ‘법’이 끼어들면 냉혹한 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의로운 판결보다 정의롭지 못한 화해가 낫다’는 말이 있다. 당한 대로 갚아주고 응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미이리라. 사고든 고의든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의 입장에선 어떤 판결도 정의롭다고 생각하거나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정의롭지 못한 화해를 통해서라도 이들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화해와 용서가 잔인하고 비열한 수법으로 누군가의 생명과 삶에 큰 해를 끼친 흉악범에게까지 해당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조금 이해하고 양보함으로써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법보다 화해를 시도하는 편이 낫다.

2001년 인천지방법원에서 민사합의부 재판장으로 근무하면서 나는 연간 150건을 조정(화해)으로 마무리 지었다. 재판을 진행하는 날이 아니면 나는 대체로 조정기일을 정해 사건 당사자들을 판사실로 오게 했다. 판사실을 찾은 당사자들에게 우선 차부터 한 잔 대접하면서 소송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그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각자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공감할 부분은 공감하며, 잘못된 주장은 증거가 어떻게 법이 어떠하므로 재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다음 상대와의 화해를 권고했다. 상대방에게 앙갚음하려고 하던 일을 제쳐두고 계속 소송에 몰두한다면 삶의 고통을 지속시키는 어리석은 선택이며, 이 자리에서 화해함으로써 분쟁을 끝내는 게 지혜로운 선택임을 설득했다. 다행히 판사의 열린 마음에 당사자들은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내가 제시하는 해결 방안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소송에 휘말린 여러 사람에게 화해를 권고하며, ‘어쩌면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자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판사가 알아주고 보듬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소송 당사자들의 마음을 읽는다면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리기도 한다.

법에도 심장이 있다면 <박영화> 저

행성B, 2019년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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