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칼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법복은 개인적 사사로움을 떠나 법관으로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라는 뜻에서 입습니다.

1986년 9월, 수원지방법원에서 판사로서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L부장판사님이 내게 법복을 입히며 해주신 말씀이다. 부장판사님의 귀한 말씀은 법복의 검은색이 주는 무게만큼 판사들이 지는 무거운 책무가 내 어깨에 얹혀 있음을 느끼게 하는 데 충분했다.

그 뒤에도 나는 재판을 앞두고 법복을 입을 때마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각오를 다졌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은 모두 털어내고 오로지 법관으로서 법과 양심에 따라 정의로운 판결을 하리라. 단 한 명의 억울한 이도 생기지 않도록 공정한 판결을 하리라. 내가 입은 법복에 단 한 톨의 먼지도 내려앉지 않게 매 순간 법관의 양심을 되새기리라’ 다짐했다.

우리나라 판사들이 재판할 때 입는 법복은 원래 검은 가운이었는데 1998년 3월부터 디자인이 조금 바뀌었다. 주색은 다른 색과 섞이지 않는 검정색으로, 판사로서 품어야 하는 양심 말고는 어떤 외부의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관의 독립성을 상징한다. 또 법복 앞단의 양면엔 수직으로 주름을 넣어 법관의 강직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는 헌법 제103조의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조항을 법복에 그대로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는 세균에 오염되지 않는 수술복을 입는다. 의사가 그렇게 하듯이 판사는 법정에 들어가기 전 사고의 오염을 막고, 판단할 때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 법복을 입는 거라고 생각한다.

법조인은 개인의 권리와 이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지라 중용과 정도를 지키기 어렵기도 하지만, 이들이 만나는 당사자들의 감정이 민감한 상태이기 때문에 공정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이 때문에 법조인들의 공정성이 때때로 의심받곤 한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변호사들에게서 판사와 검사에 대한 평가를 받아 작성한 우수 그룹과 하위 그룹의 명단을 소속기관에 통보하고, 일부는 언론에 발표한다. 이런 평가는 해마다 이루어지는데 변호사들이 생각하는 긍정적 평가 요소와 부정적 평가 요소는 해가 바뀌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고 있다. 대체로 판사와 관련해선 여러 평가 요소 중 ‘충실한 심리와 공정한 재판 진행’이 우수한 판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나타났다. 한편 ‘고압적 자세와 편파적 진행’은 판사가 낮은 평가를 받는 주된 요인이었다.

고등법원에서 재판장으로 모시던 S부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법정에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에게 ‘재판장으로서 야단을 좀 치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나의 항의성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판사는 사건과 일정한 간격을 두어야 합니다. 사건 속으로 너무 들어가면 개인적 감정이 앞서고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또 판사가 화를 낸다는 건 ‘나’라는 아상(我相)을 앞세우는 오만입니다.”

부처님 같은 분이라고 불리던 S부장님의 어른다운 말씀에 난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사건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판사 개인의 감정까지 이입돼 공정성과 중용적 자세가 흐트러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뒤로 판사로서 재판을 진행하다가 화가 치밀 땐 ‘판사가 왜 화를 내느냐’는 S부장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법조인은 주어진 권한을 목적과 직분에 충실하게 사용해야 하고, 허위를 걷어내고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품게 되는 여러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 진실을 찾는 검사나 판사는 겸허히 두 귀를 열고 경청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자신이 아는 바가 100퍼센트 진실이라 단정하고 함부로 법의 칼을 꺼내들어 위협한다면 분명 잘못된 태도다. 이 또한 법과 권력의 힘을 빌린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다.

법에도 심장이 있다면 <박영화> 저

행성B, 2019년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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