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봉의 무게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나는 16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법대에 앉아 최선을 다해 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당시에 내린 모든 결론이 진실과 정의에 부합하는 판단이었다고 확언할 순 없다.

판사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판사로 일하며 단 한 건의 사건도 가벼이 여긴 적이 없다. 온종일 사건기록과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고 늦은 밤까지 어느 주장이 맞는지 저울질하다가 어렵게 판결문을 완성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과연 내가 어젯밤에 내린 결론이 옳은 것일까? 최선의 답일까?’

20대 후반에 판사로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엔 영장실질심사제도가 도입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영장이 청구된 피의자를 판사가 심문할 기회 없이 수사기록만으로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판단했다. 그날 영장 청구 대상자 중엔 40대 아주머니 한 분도 포함돼 있었다. 지인들에게서 많은 돈을 빌린 후 약속한 날짜를 훌쩍 넘기고도 갚지 않아 사기죄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수사기록에 나온 사진과 피의자신문조서를 보니, 아주머니는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 산속에 텐트를 치고 어린 자녀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구속 여부를 판단하는 첫 번째 사유는 ‘증거인멸의 우려’다. ‘증거인멸’은 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없애거나 조작하는 것이다. 물적 증거를 망가뜨리거나 조작하는 경우는 물론, 증인을 꾀거나 겁을 주어 거짓 진술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사유는 ‘도주 우려’다. 피의자가 도망가서 연락이 닿지 않거나 찾을 수 없으면 수사나 재판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 살던 곳을 떠나 어딘가에 숨거나 사는 곳이 일정치 않으면 도주 우려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이미 경찰에 거처가 노출된 상태라 구속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또 다른 곳으로 숨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도 위험해질뿐더러, 이어진 도피 생활에 아주머니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염려스러운 상황이었다.

구속 이유가 명확했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구속영장 발부 신청서에 서명하기가 망설여졌다. 아주머니는 남편 없이 홀로 어린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다. 소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사기 친 것은 아닌 듯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아주머니에게 구속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피의자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원해 아주머니에게 온정을 베풀 수만도 없었다. 피해자의 억울한 심정을 풀어주고 피의자인 아주머니의 딱한 처지까지 헤아릴 수 있는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일지 고민했지만, 결국 영장 담당 판사인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답은 없었다.

고민 끝에 구속영장에 내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영장이 발부됐고 아주머니는 그날부터 구속 상태로 수사와 재판을 받게 되었다. 막상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갚을 능력이 없으면서 남의 돈을 빌려 쓰곤 갚지 않았으므로 사기죄가 성립됐고, 도주 우려까지 있었으니 아주머니는 법적으로 구속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숲속 텐트에서 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깜깜한 밤을 보내야 했던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물론 돌봐줄 친족이 없다면 아이들은 법이 지정한 보호시설에서 지낼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거처가 텐트에서 보호시설로 옮겨졌을 뿐, 아이들은 세상의 유일한 울타리였던 엄마의 부재를 느끼며 하루하루 슬픔을 안고 살아갈 게 분명했다. 아이들 역시 또 다른 의미의 피해자가 되진 않을까?

아주머니의 죄가 아니라 남겨질 아이들의 상처를 먼저 살폈어야하진 않았나,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말고 이 가족을 생각해 더 깊이 고민했어야 하지 않았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날의 판단을 돌아보며 ‘그때, 나는 옳았던가?’를 되묻는다.

판사는 수많은 사건을 심리해 판결을 선고한다. 메스를 잡은 의사가 수술대에 누운 환자의 살을 도려낼 때처럼 판사의 판결은 누군가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을 만큼 날카롭고 중대한 결정이다. 그러니 판사는 마지막까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고민할 수밖에 없다.

깊은 밤 스르르 풀려버린 오랜 고뇌로 가득한 보자기를 다시 묶으며, 나는 그 아이들이 부디 큰 상처 없이 잘 자라주었길 소망해본다.

법에도 심장이 있다면 <박영화> 저

행성B, 2019년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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