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의무라는 이름의 천형

천형

(天刑)

[명사] 같은 말 : 천벌(天罰)(하늘이 내리는 큰 벌).

  군에 다녀온 사람도, 못 가거나 안 간 사람도 모두가 평생 군대병을 지니고 산다. 이민을 떠나 수십 년째 외국에 살고 있는 70대 노인도 심신이 지칠 때는 이따금씩 징집영장을 받는 악몽을 꾼다고 한다.

  헌법은 ‘누구든지 병역 의무의 이행으로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제39조 2항)고 규정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원리를 굳이 헌법이 강조하는 숨은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징병된 군 복무자에게 엄청난 불이익이 주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한창 인생과 장래를 설계하며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는 청년들에게 군복무는 별도의 계획을 세울 것을 강요한다.

  그것은 꿈의 유보, 사회적 관계와 경력의 단절이다. 사회생활과의 단절, 바깥세계로부터의 격리, 소외되는 것 자체가 청년에게는 적지 않은 불이익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솔직히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군복무가 향후의 삶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불만이 가득 차 있다. ‘군대가 사람을 만든다!’는, 기성세대가 강조하는 전래의 경구도 신세대 청년들에게는 괜한 헛말에 불과하다.

‘여성 징병제’에 대하여

  1999년, 헌법재판소는 하위직 공무원시험에서 사병 복무자에게 일정한 가산점을 부여한 정책을 위헌으로 선언했다. 국민의 반응이 뜨거웠다. 여성은 환호하고, 남자는 분개했다. ‘여자도 군대에 보내야한다’는 선동적인 구호가 등장했다. 이는 군 인력의 확보나 남녀평등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너희도 군대에서 고생해보라’는 감정적 대응이었다. 이에 맞서 여자는 출산의 부담을 지기 때문에 군복무를 면제받는다는 기상천외의 방어논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군대에 관한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남성 군필자들에 의해 반복되어온 ‘희생 논리’와 이에 대한 여성의 방어로 ‘사회적 약자 논리’가 제시되었다. 남성 징병제는 남자만 군대에 간다는 피해의식을 공유시키고, 여성 비하를 전제로 한 왜곡된 남성 연대감을 형성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미국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막바지인 1973년에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도입했다. 모병제 아래서도 군 복무자에게 공무원 채용에 있어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하는 주정부도 많다. 미국 법원은 1979년 이래 지속적으로 이런 제대군인 우대정책을 헌법에 부합한다고 확인해왔다.

이제 ‘모병제’를 논의할 때다

  군대의 구성과 운영에 자유민주주의 헌정의 원리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 것인가? 이는 많은 나라에 공통된 과제다. 핵심 주제의 하나가 징병제냐, 아니면 모병제냐이다. 병역을 의무로 강제하는 징병제를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과 자율적 책임을 바탕으로 삼는 모병제를 채택할 것인가?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모병제가 선진국의 추세가 되었다. 한때는 누구나 의문 없이 징병제를 신봉했던 나라들이 앞다투어 모병제로 전환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한 후에도 여전히 미국 군대는 세계 최강이다. 군복무자의 일상적 자율도 최대한 존중된다. 일본의 자위대는 물론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이다. 유럽은 거의 예외 없이 모병제다. 타이완도 최근에 모병제로 전환하고 있다. 요컨대 군인이 합당한 대접을 받는 나라야만 선진국이다.

  징병제의 치명적인 약점은 일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청년을 바깥세상과 단절시킨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취학연령도 높고, 교육기간도 길다. 또한 OECD 국가 중에서 평균 경제활동 기간이 가장 짧다. 그 짧은 활동기간의 중심에 몇 년간의 군복무로 인해 커다란 공백이 발생한다.

  이제 모병제의 장점을 충분히 살릴 때가 되었다. 모병제로 전환하면 수십만 개의 청년 일자리가 생긴다. 모병제는 군대를 양질의 직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모병제는 ‘헬조선’의 구호를 뇌까리면서 자조와 실의에 빠진 청년들의 삶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군대의 사병은 독립된 지위와 인격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 부품 상태를 면치 못한다. 사병 복무로 얻은 지식과 경험은 제대 후의 사회활동에서 전혀 자산이 되지 못한다. ‘군에서 썩는다’는 냉소적 표현이 국민적 공감을 얻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군복무중에 쌓은 경력은 전역 후에도 자산이 되도록 하려면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면 남는 것은 예산 문제다. 과연 얼마만큼 예산이 소요되는지, 우리나라의 재정 규모에 비추어 합당한 규모인지, 소요예산을 다른 예산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거창한 전래의 명분에 집착하지 말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전향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15

※ 이 글에서 인용한 도서

15. 안경환, <자유와 자율로 강한 군대를!>(모병제 희망모임 제1차 토론회 기조 발제문), 2016.09.05

출처: 안경환, 《남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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