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의 위험을 느끼고 건물 밖으로 피신, 살았다는 생각도 잠시였다. 잠든 채 불길에 휩싸여 죽음을 맞이할 이웃들 생각에 그는 다시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 사람들을 깨운 후 정작 자신은 연기 속에서 숨을 거뒀다. 얼마 전 쌍문동 빌라의 '초인종 의인'으로 남게 된 故 안치범 씨의 이야기다. 그가 했던 것처럼 남을 구하기 위해 나를 던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가장 진지하게 했던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세월호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가라앉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하고 떠난 이들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행동을 보인 이준석 선장은 살아남는 것이 위험을 맞닥뜨린 순간에 해야 하는 최우선의 일이 아님을 확실히 느끼게 했다.

생존은 위험 앞에 인간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굳이 선택하지 않더라도 본능은 생존에 모든 힘을 쓰도록 애쓸 것이다. 다만 혼자 살아남는 것과 조금의 위험을 더 안더라도 같이 살아남는 것의 선택지를 두고 갈등하게 된다. 이준석 선장의 경우 직업적 의무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갈등을 했던 기미조차 보이지 않기에 비난을 받았다. 자신을 희생한 이들을 의인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그들과 같을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생존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생존을 함께 걱정할 수 있어야 인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부산행>은 생존을 앞에 두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묻는다. 개미투자자의 입장 같은 건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온 펀드매니저 석우. 그는 딸에게 위험한 상황 속에선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내 이익, 나 자신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낯설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의 입장을 고려해주는 일은 물론이고, 일상에서도 양보와 배려를 마주할 기회는 너무나도 흔치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혹시라도 석우의 태도가 어딘가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할까 걱정했는지, 영화는 딸과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그가 옳지 않음을 반복적으로 설명한다.

제 몸만 걱정하는 또 다른 이들의 배척을 겪는 동시에 타인의 도움으로 생존을 이어가며 석우는 빠르게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데도 그럴싸한 이유들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석우의 입체적인 캐릭터는 이 영화의 가장 값진 부분인 것 같다. 오락성이 짙고 다분히 비현실적인 좀비가 위험요소로 등장함에도 불구, 고속철이라는 대중교통 속에서 정보에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 놓이는 배경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한 부분이다. 이런 현실감은 석우에 더 쉽게 몰입하게 하고, 아쉬운 부분 역시 꽤 많은 이 영화를 의미 있게 기억하도록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