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잊을 수 없는, 새까만 바다에서 벌어진 참사는 살아가는 일이 살아남는 일임을 깨닫게 했다. 조금 더 거슬러 세계 중심에 선 사무실 건물이 두 동강 날 때에도, 바로 얼마 전 '사랑의 도시'의 금요일 밤이 붉게 물들 때에도 비슷했다. 매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고 느꼈다. 끝이 안 보이는 내전으로 얼룩진 땅에서만 그런 줄로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이번 주말을 계획하고, 다음 달 여행을 준비하는 반복적이고 뻔한 일상에서는 죽음보다 삶이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외면했던 진실을 발견하듯, 비극이 있을 때면 어디에서나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예견할 수 있는 죽음,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죽음은 거의 없다. 나이 들고, 병든 자의 떠남은 그 소수에 속하지 않을까. <에브리맨>의 주인공 '그'의 죽음은 여기 속하는 편이다. '그'는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겼고, 쉰이 넘으며 자신의 노화를 체감한다.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던 죽음이 코 앞에 다가옴을 느낄 때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지만, 그의 죽음은 비교적 자연스럽다. 그야말로 나이 들어 죽는 것의 전형이라 할 만큼 그의 죽음은 예상할 만하다. 그럼에도 그의 심장이 그때에 멈추게 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가장 살고자 할 때에, 비로소 생을 사랑하려 할 때에 찾아온 그의 죽음. 나이 들어 죽는 것이라고 해서 젊은이의 우연한 사고보다 죽음에 초연하거나 철저한 준비가 돼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살아온 시간이 더 길기에 더 여러 번 죽음을 걱정해 보았을 뿐.

건강하던 사람이 사고로 떠나는 것과 나이 들어 병으로 떠나는 것을 두고 경중을 따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 화면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죽음만 보지 말고, 내 아버지의 죽음도 보아 달라고 말하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불쌍한 어린 것들은 죽고 다 늙은 것들이 악착 같이 살았다고 험한 말을 하는 이들에 서운함을 토하며,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자신의 아버지를 안쓰러이 여기는 딸이었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영화 같은 일들 앞에, 우리는 더 어리고 약한 생명에 더 많은 기회를 주려 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함이겠으나 그게 결코 노년의 죽음을 만만히 여기는 일은 아니었으면 싶다.

어느 땅에서의 죽음이든 그것 또한 마찬가지. '에브리맨'은 보통 사람을 뜻한다. 흔히 있을 것 같은 '그'의 죽음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보통의 죽음이지만, 이것 역시 영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냥 평화로이 두어도 죽음은 이렇게 찾아오는데, 인간의 의지로 삶과 죽음을 결정짓고 무게를 재는 일을 우리는 굳이 해야만 하는 걸까. 보통의 사람, 보통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오늘, '보통'이라는 건 너무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입을 메우고, 눈을 가리고, 콧구멍을 틀어막고, 귀를 닫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 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66쪽)

그를 도우러 해안까지 오기는 했지만, 이 차분하고 분별력 있는 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모의 이혼으로 생긴 어려움들을 되새기면서 반평생 이상 품고 살았던, 부모의 이혼으로 생긴 어려움들을 되새기면서 반평생 이상 품고 살았던, 부모의 화해라는 사라지지 않는 환상을 고백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며 딸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품 안의 그녀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83쪽)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162쪽)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1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