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은 평가를 내릴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몇몇 배우들이 있다. 우리는 히들이라 부르는 톰 히들스턴도 여기 속한다. 아름다운 신의 창조물을 감상하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덧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버리니, 어떻게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크림슨 피크>도 얼마 안 가 히들스턴의 슬프고 영롱한 눈망울과 탐스러운 엉덩이로만 남게 되겠지만, 아직 감상 후 6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이 영화에 대해 내가 가진 20대의 뇌는 그래도 몇 가지를 더 기억할 수 있으니 적어 놓으려 한다.

배우뿐 아니라, 감독의 팬에게도 이 영화는 의미 있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진하고 선명한 색상과 고풍스러운 시대 연출이 만드는 으스스함은 그의 팬이라면 좋아할 법한 그의 스타일 중 하나다. 이 영화에 특별히 기대를 모은 것도, <판의 미로>나 <오퍼나지> 등으로 확실히 인정받았던 이런 면모를 다시 보여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의 <퍼시픽 림>은 그에게 있어 새로운 도전이었겠지만, 기대와 너무 다른 데다 여러 모로 끝까지 보기 힘들었던 그 영화는 길예르모 델 토로에 대한 실망의 계기이기도 했다. <크림슨 피크>는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으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이런 행보에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의 <퍼시픽 림> 후속작이 역경을 극복해가며 준비되고 있기 때문. 아쉽지만, 그는 포기를 모른다.

<크림슨 피크>는 기대한 거의 모든 것을 충족시킨다. 고딕 스타일로 디테일하게 완성된 장면들과 아름다운 의상, 을씨년스러운 사운드와 특유의 분위기, 배우들의 호연. 캐스팅부터가 완벽에 가깝지만, 특히 제시카 차스테인은 그녀의 다음 영화에 선입견을 심어줄 만큼 강렬하다. 다만, 공포영화로 보기엔 집과 마음에 깃든 유령의 공포 강도가 좀 낮은 편. 오히려 차스테인이 분한 루실이 훨씬 무섭다. CG나 연출은 훌륭하다. 대신, 스토리의 진부함 때문일 것 같다. 넋 놓고 보는 와중에도 매번 뻔히 예상되던 이야기는 헉하고 놀랄 심리적 허점들을 빈틈없이 채워놓곤 했다. 한편 공포물로서 완전히 실망이라곤 할 수 없는 게, 확대된 곤충들과 핏빛이 얽힌 장면들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잔혹했다.

내겐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가 히들스턴의 최고로 멋진 영화지만, <크림슨 피크>도 히들스턴의 입덕용 영화로 손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연 있는 고민남으로 우수 어린 눈빛을 뚝뚝 흘리며, 훠이훠이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고저택을 누비는 히들스턴은 그의 팬들에게 팬질을 멈출 수 없게끔 열심히 부추긴다. 여배우들도 꽁꽁 싸매며 안 보여주는 살갗을 짠하고 보여주는 부분 역시 설명이 필요 없다. 전적으로 팬을 위한 영화라 할 만한 <크림슨 피크>를 잔혹함과 스크린 수의 경계를 넘지 못해 만나지 못하는 팬이 있다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팬들이여, 사실 이 영화는 조금 센 치정극에 가까우니 용기와 부지런함을 시전 하시길 바란다.

자! 그가 이렇게 초대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