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스릴러물의 풍년입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추격전과 액션, 그리고 살벌한 두뇌 싸움이 주는 촘촘한 긴장감은 최근 들어 영화 스크린을 넘어 TV에서도 연속 히트하면서, 매력을 인정 받고 있는데요. 개중에는 본방 사수를 자처할 만큼 수준 높은 작품들도 많았지만, 범죄 스릴러물은 역시 깜깜한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이 아닐까 합니다. 기다림이 갈증으로 바뀔 무렵 영화 '악의 연대기' 개봉 소식은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희소식이었죠. 드라마 '추격자'에서 딸의 죽음에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아버지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던 배우 손현주가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데,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담당자가 된다는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 이제 남은 건 확인 작업뿐인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 했느냐'까지는 흥미진진했지만, '왜 했느냐'에서는 김이 샌 감이 있어요. 반전에 몰입한 나머지 구성이 다소 헐겁고 주인공의 운명을 둘러싼 박진감과 긴장감도 일관되게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도 아쉬운 점인데요. 은근슬쩍 소름 돋고 제법 몰입하며 봤으니 즐기며 볼 만한 요소도 분명히 있는 영화인 것도 사실입니다.

   죄의 시작

   죄가 아닐 수 있었습니다. 최반장은 동료들과의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의문의 괴한에게 납치, 공격을 받던 중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요.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정상 참작도 무리가 없었을 상황. 하지만 전화기에서 112 버튼을 누르려던 그는 돌연 태도를 바꿉니다. 특급 승진을 앞둔 이때,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밝혀지더라도 구설수에 오르게 될 테고 자연히 승진에도 불리하게 작용하리라 판단했던 모양인데요. 결심이 섰다면 남은 건 행동뿐입니다. 철저하게 사건을 은폐하고 영영 이 날의 기억과 작별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내가 죽인 시체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죽인 시체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최반장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한 노력은 또 다른 죄가 되는데요. 전형적인 '일이 점점 커지네'와 같은 전개 속에서 최반장 앞에 놓인 운명은 꼬일 대로 꼬여 버렸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지도 가늠할 수 없는 이때, 상황을 이렇게 만든 진범마저 최반장의 목을 조여오는데요. 반격하느냐 끌려다니느냐 이제 두 번째 선택이 그를 기다립니다.

   '악'은 어디에?

   영화의 시작 장면을 보고는 '악의 연대기'라는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전 짙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악'과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신경이 곤두섰는데요. 궁지에 몰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면, 어떻게 상황을 돌파하고 반격을 꾀하는가가 극의 재미를 이끌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영화 '악의 연대기'의 주인공 최반장은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기 바쁩니다. 반격의 의지를 갖기까지도 힘에 부치고 객관적으로 전후 사정을 따져본다거나 의심을 품지도 않으니 자연히 긴장감은 떨어지고요. 진범과 복수의 비밀도 저절로 공개되어 버려, 극의 재미도 반감됩니다. 영화의 반전은 충분히 놀라웠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데요. 그래서 '악'은 어디에 있나요?

   차라리 위기에 빠진 순간부터 주인공 역시 절대악으로 변신해서 악과 악의 대결을 보여주었다거나 치밀한 반격으로 역으로 진범에 대한 복수에 성공했더라면, 어쩌면 지금보다 조금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