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64년 겨울, 그 후 50번째 겨울
녹색양말 2015.01.21 00:26:46
서울 1964년 겨울, 그 후 50번째 겨울
만약 소설이란 분야에도 신이 존재한다면, 작가가 정말로 접신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소설집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책이 있다. 바로 김승옥의 단편집 <무진기행>이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표제작인 <무진기행>을 꺼내 읽고, 겨울이 오면 그의 또 다른 단편인 <서울 1964년 겨울>을 꺼내 읽는다. 두 편 모두 고등학교 야자 시절, 어느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처음 만났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김승옥의 문학 지문을 읽고 나서 느꼈었던 그 오묘함이란 다른 때와는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딸린 문제들은 한참 전에 다 풀었지만 그 잔상은 계속 책상에 남아 나의 남은 야자시간을 뒤덮었다. 결국 하굣길에 모의고사 문제집 사려고 챙겨둔 돈으로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덜컥 사버리고 말았다. 평소의 나다운 선택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진기행>을 내 책상에 꽂아둔지 10년, 그리고 <서울 1964년 겨울>로부터 무려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구청 병사계에서 일을 했던 '나'도 부잣집 아들래미이자 대학원생이었던 '안(安)'도, 아직까지 살아있다 치면 춘추가 벌써 75세이다. 그들이 따로 또 같이 보냈을 50번의 겨울은 그들의 정수리 위에 흰 눈을 뿌렸거나 아니면 검은 뿌리들을 몽땅 뽑아버렸거나 둘 중에 한 가지는 했을 것이다. 파리는 여전히 하늘을 날기도 하고, 손을 뻗어보면 손안에 잡히기도 하지만, 포장마차에서는 이제 참새구이 대신 출처가 불분명한 닭꼬치를 판다. 젊은 청춘들은 일을 마치고서 홀로 선술집을 찾기보다는, 길가에 즐비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거나, 조금 더 여유가 있다 싶으면 근처의 바를 찾아간다. 가끔 한 모금씩 홀짝이며 주위 사람들을 눈으로 훑어보기는 하지만, 헌팅이 목적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말 따위는 굳이 건네지 않는다. 괜한 오해도 싫고, 괜한 어색함도 싫다. 눈앞에 서있는 낯선 누군가보다는 조그만 휴대폰 속 익명의 누군가가 차라리 더 편하다. 언제라도 홈버튼만 누르면 그들과의 관계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무진의 명산물이 모두를 휘감는 뿌연 안개였다면, 서울의 명산물은 개인들을 더욱 또렷하게 분리하는 욕망이었다. 2014년 무진의 명산물은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이 되었으며, 서울의 명산물은 여전히 욕망이기는 하다. 하지만 요즘은 시대가 좋아진 탓인지 서울밖을 벗어나도 우리는 아주 손쉽게 욕망과 마주할 수 있다. 64년 당시 '나'와 '안(安)'의 청춘은 마치 발밑의 흙물처럼 기온에 따라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는 살얼음 같은 개인주의였다. 비정하기는 하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하였고, 모질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인간답지는 않았다. 그들의 인간성은 어는 점 0℃를 기준으로 묘하게 꿈틀거렸다. 그러한 꿈틀거림은 어느 여대생의 아랫배의 호흡과도 같이 평온해 보이기도 했다. 반면 요즘의 청춘들은 그 요동의 폭이 남다르다. 이상하다. 평균치를 내어보면 이들이 수렴하는 곳도 분명 0℃가 맞는듯한데, 그 움직임은 확연히 다르다. 유행하는 걸그룹의 안무처럼 위아래의 움직임이 퍽이나 격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딱히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러한 세태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도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 있는 일들도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옆집 아저씨의 야구 동영상 취향이 무엇인지를 복도 창문 너머로 확인하는 일 따위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딴 건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또 실제로 나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 이야기마저 64년도의 '나'와 '안(安)'을 제외하면 인정해줄 사람도 없다는 게 함정이다. SNS가 발달하고부터는 나만 알고 있는 게 큰 의미가 없어지고, 남도 알게 하는 것에 오히려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 이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대로인 것은 오로지 겨울이라는 사실이다. 날씨가 춥다. 추위는 언제나 외로움을 수반한다. 도시의 청춘들은 여전히 외롭다. 그래서 타인의 죽음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서울 1964년 겨울>의 마지막 장에 두 청춘은 이렇게 말했었다.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286~287p
이 겨울이 지나가면 반드시 봄이 찾아오고 또 그다음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76세를 바라보는 '나'와 '안(安)', 그리고 20대 후반을 달리는 우리들, 이 두 무리 중 노화의 속도가 더 빠른 쪽이 어디일지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장담할 수가 없을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