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마다 곱게 피어나 진종일 빠알간 꽃잎 위에 노오란 금가루를 뿌리고 있는 동백꽃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두 눈동자 속에도 빠알간 동백꽃이 피어나는 듯하다. 동전 몇 개 달랑거리는 나그네의 허전한 주머니 속에서도 첫사랑의 설렘보다 더 들뜬 동백꽃이 마구 피어나 노오란 금가루를 뿌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 나그네의 스무살 시절, 나그네에게 첫사랑의 상처를 남긴 그 가시나는 우물가 곁에 피어나는 빠알간 동백꽃과 천리향을 유달리 좋아했다. 그때 나그네는 동백꽃이 그 가시나의 빠알간 입술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마을 골목길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그러운 천리향은 그 가시나의 몸에서 나는 향기라고 여겼다.

"니 하루에 내 생각을 몇 번씩이나 하노?"
"셀 수가 없어."
"내가 그렇게 좋나?"
"그걸 꼭 확인해야 되것나?"
"......"
"나 참! 그렇다고 가슴을 열어 보일 수도 없고."
"인자 다른 가시나한테 눈을 돌릴 때도 안 됐나?"
"내 맘 속에는 니빼기(너밖에) 없다."

지금 나그네와 반주깨미(소꿉장난) 살던 그 가시나의 입술을 빼다 박은 빠알간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고 있다. 동백꽃 떨어진 자리에 연보랏빛 천리향이 간밤 미리내에서 우수수 쏟아진 별처럼 예쁜 얼굴을 환하게 빛내고 있다. 천리향과 오래 눈 맞추고 있으면 온몸에서 그 가시나의 향내가 난다.

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마치 첫사랑의 그 가시나가 툭툭 던지는 짜릿한 눈빛처럼. 하지만 문득 땅에 떨어져 뒹구는 시든 꽃을 바라보면 마음이 시리다. 마음이 시리다 못해 이젠 몸까지 마구 쑤시고 아프다. 마치 나그네가 평생 가슴 깊숙이 꼬옥 품고 있었던 그 예쁜 가시나의 실루엣이 슬며시 지워지고 있는 것처럼.

꽃은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지겹거나 얄밉지가 않다. 사람은 자주 만나다 보면 때론 지겹기도 하고, 얄미울 때도 더러 있다. 이는 아무리 스스럼없이 마음을 털어놓고 할 말 못 할 말 다하는 살가운 벗이라 하더라도,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그 가시나라 하더라도, 사람은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숨겨둔 흠집이 드러나기 때문일 게다.

꽃은 위아래, 사방팔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곱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 실바람 앞에 맥없이 툭툭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는 순간은 슬프다. 땅에 떨어져 뒹굴다 천천히 시들어가는 꽃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이다. 하지만 꽃은 그렇게 떨어지지만 내년 다시 피어날 그날의 아름다운 봄을 위해 씨앗을 남긴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
"이제 내가 싫어졌어?"
"아니, 너가 날마다 바라보는 내 거울이었으면 좋겠어."
"근데, 왜 날 버리려고 그래."
"내가 널 너무 깊이 새겼나 봐."
"?"
"너가 자꾸 눈에 밟혀 아무런 일을 할 수도 없고, 이러다가 그만 병이라도 들 것만 같아. 사랑은 집착이 아이라카던데."

그래. 나그네의 아름다운 첫사랑이었던 그 가시나도 꽃처럼 예뻤다. 위 아래, 사방팔방을 둘러보아도 곱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 가시나가 까닭도 없이 나그네의 곁을 떠나갈 때 땅에 떨어져 뒹구는 꽃을 바라보는 것처럼 무척 슬펐다. 그 가시나는 그렇게 떨어지는 꽃처럼 내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마음에 그리움과 기다림이란 씨앗을 남겼다.

사랑도 꽃인가 보다. 지금 나그네가 눈 저리도록 바라보고 있는 동백꽃과 천리향이 그때 그 가시나의 얼굴로 피어나고 있다. 쌍꺼풀 예쁘게 진 까아만 눈빛으로 눈웃음 툭툭 던질 때마다 볼우물 포옥 패이던 첫사랑의 그 가시나가 동백꽃과 천리향이 되어 귓속말을 속삭인다. "저 꽃들이 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사랑도 지고 말거야".

이소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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