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 옆에 놓인 감자칩과 샐러드같이, 메인 도로와는 다른 한적함이 아직 그곳에 남아 있으니.
취향이 은근히 까다로운 친구들을 둔 덕택에 약속 장소를 고를 때에는 별첨 표시가 가득 붙게 된다. 대화 내용이 옆 테이블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시끄러울 것. 메뉴는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헤비하지도, 돈이 아까울 정도로 콩알만큼도 아닌 적당한 양. 각자 차를 가지고 와도 주차 공간을 고민하지 않도록 ‘발레파킹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 옷 잘 입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 ‘물’이 청정수처럼 맑게 관리되는 곳.
어느 날 오후 이런 까칠 멤버들의 약속 장소로 점지된 곳은 가로수길 알로 페이퍼가든. 약속 장소 선정 조건에 비교적 들어맞는다 생각한 우리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눈치 챘다. 나름 노는 법을 좀 안다는 사람들의 황금 시간대, 금요일 오후 7시. 문 앞에 삼삼오오 서 있는 그룹만 봐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겨우 들어가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분위기였다.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고 번호표를 받아들고 언제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나올지 기다리는데, 그 그림은 우아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영락없이 신당동 떡볶이타운 분위기였다. 가로수길에 대한 감흥이 점차 사라지던 차에, 이날 이후 남은 정도 떨어져나갔다.
그래서 한동안 발길을 끊었는데, 어느 날 지인이 또다시 가로수길로 불러낸다. “메인 도로에서 압구정 쪽 블록, 미니스톱 편의점 안쪽 길로 쭉 들어와서, 서울부동산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그의 단골집을 찾아가는 것은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난해한 코스였지만, 도착하고 나니 이곳이 요즘 내가 보고 느낀 가로수길이 맞나 싶다.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북유럽식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 ‘바리에맑음’. 메인 도로에서 세 블록이나 들어와 주택가에 떡하니 있어서인지, 인테리어가 해맑아서인지 잠시 앉아 있는데도 노천욕을 하는 것처럼 기분 좋게 늘어진다. 카페 주인의 얘기로는 좀더 들어가면 신기루처럼 상점이 하나 둘 보일 거라 한다. 그 얘기에 갑자기 탐험 심리가 발동한다. 그곳을 나와 무작정 앞쪽 길로 걸어가 보니, 3분도 채 걷지 않아 작은 상점이 나타난다. ‘MIH O’는 언더그라운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윤미선의 작업실 겸 쇼룸인데, 저지와 면, 리넨 등의 친근감 있는 소재로 만든 의상이 마치 작품처럼 디스플레이되어 있다. 가격도 생각보다 착해 원피스가 보통 20만원대. 건너편 편의점 뒤에 수줍게 숨어 있는 ‘LUXUEUX de MIO’는 남자 두 명이 직접 디자인한 구두를 판매하는 곳. 이탈리아와 터키 가죽을 사용하고, 수작업으로 꼼꼼하게 만든 아이템을 만날 수 있는 것이 매력. 바로 옆 ‘555번지’는 짜파게티와 옛날 냉커피 등 소박한 메뉴가 있는 아담한 카페로, 혼자 놀기에 심취한 나의 아지트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을 오른쪽 옆으로 끼고 압구정역 방향으로 뻗은 작은 골목길로 내려가니 프린트가 화려한 빈티지 의상을 파는 ‘엄지맑음’, 세컨드 명품 브랜드 의상을 바잉해 판매하는 ‘DRESS-CIRCLE’, 이화여대 출신 섬유 디자이너들의 쇼룸인 ‘보우뷰’ 등 옷 욕심 많은 이들의 지갑 속 비상금을 털어버릴, 크고 작은 패션숍들이 눈에 띈다. 보우뷰에서는 숍에서 판매하는 제품과 비슷한 아트 패브릭 티셔츠와 스카프 등을 만들 수 있는 클래스도 운영한다고 하니, 기회가 된다면 나만의 티셔츠를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블록 더 내려가니 빈티지한 주택가 사이에 블랙 아이스 피어스 음악같이 경쾌한 느낌의 노천식 레스토랑이 시야에 들어온다. ‘fork fork’는 알고 보니 업계에서 꽤 유명한 헤어디자이너 예원상과 뉴욕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잘 가는 레스토랑 ‘노부’에서 근무한 셰프 김상범이 함께 운영하는 아메리칸식 미니 다이너. 그래서인지 인테리어부터 메뉴까지 ‘버터’ 느낌이 완연하다.
뒷골목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이곳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스친다. 가로수길 메인 도로처럼 북적거리면 뒷골목이 지닌 감칠맛이 사라질 것 같아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