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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무료 상설전시 3전시 한국인의 일생 & 기증자료전 기억의 공감
15  미니하우스 2018.05.17 08:21:58
조회 328 댓글 1 신고




국립민속박물관 무료 상설전시 3전시


한국인의 일생 & 기증자료전 기억의 공감




한국의 모습을 담은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장

오늘은 3전시 한국인의 일생과 기증자료전 기억의 공감입니다.




 

1전시 한민족생활사


2전시 한국인의 일상


3전시 한국인의 일생


조선시대(1392~1910) 양반 사대부 집안의 개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한 과정을 전시한 한국인의 일생과

2016년에 기증받은 대표작과 기증품들은 오랜 시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즐거움이 되어주던 소중한 사례들이 담겨 있습니다. ​

주 소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 국립민속박물관


전 화 : 02-3704-3114



※ 안국역 1번 출구, 광화문역 2번 출구


삼청동길을 따라 400미터쯤 직진


왼쪽 횡단보도 건너편에 국립민속박물관 위치.




국립민속박물관 관람시간



3월~5월 09:00~18:00 / 17:00까지 입장


6월~8월 09:00~18:30 / 17:30까지 입장


9월~10월 09:00~18:00 / 17:00까지 입장


11월~2월 09:00~17:00 / 16:00까지 입장


★ 관람료 무료










국립민속박물관 무료 상설전시



3전시 한국인의 일생



조선시대(1392~1910) 양반 사대부 집안의 개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한 과정을 전시.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따라 아들 중심의 가계 계승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출산 전부터 남자아이를


기원하였고 출산 후에는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였다.



남자는 20세에 관례를 여자는 15세에 계례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받고 혼례를 치러 가족을 구성했다.

남자는 과거를 봐서 관직에 나가고 여자는 안주인으로 집안 살림을 관장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겼다.



죽음에 따른 가족의 슬픔은 삼년상이라는 상례를 치르면서 극복하고 돌아가신 조상은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3전시 한국인의 일생





출생



조선시대에는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이 사회적인 관습이었으므로 아들을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다.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삼신할머니에게 '자손번창'과 '부귀다남'을 기원하며 건강한 남자아이의 출산을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대문에 금줄을 쳐 아이의 출생을 알리고 부정한 것의 출입을 막았으며 태를 태항아리에 담아 깨끗한


곳에 묻거나 불에 태워 아이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후에 백일잔치를 하여 비로소 축하하고 1년 후에는


돌잔치를 하여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신방



신방은 혼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방으로 꽃과 새, 꽃과 나비 그림 병풍에 한 쌍의 원앙을


수놓은 원앙금침을 깔고 나비 촛대에는 화촉을 밝혔다.



화조도, 화접도 병풍은 부부화합과 원앙금침은 한 쌍의 원앙처럼 부부가 오래도록 살기를 염원한 뜻이 담겨 있다.










삼신상 & 삼신단지



삼신은 아이를 점지해주고 출산 후에는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돌봐주는 신으로 산신이라고도 한다.


삼신상은 출산을 도와준 삼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올리는 상으로 흔히 방 안 윗목에 두었다.



출산 전에는 삼신상에 한지를 깔고 쌀, 미역, 정화수 등을 올렸는데 출산하자마자 상에 올렸던 쌀과


미역으로 국밥을 지어 산모에게 먹였다.



삼신을 모시는 항아리 삼신단지는 아이를 점지하고 산모를 보살피는 삼신의 신체 단지 안에 쌀을 넣고


한지로 덮은 후 주로 안방의 시렁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가 태어난 지 1년이 되는 첫 생일


아이가 무사히 첫 생일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고 장차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돌 상에는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는 백설기와 실타래 이외에 ‘돌잡이’ 물건을 놓고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돈이나 곡식을 잡으면 부자


책, 붓을 잡으면 문관


활, 화살을 잡으면 장군이 되고 실패나 가위를 잡으면 바느질을 잘할 것으로 여겼다.




타래버선(20세기~1940년대)



아이가 주로 돌옷을 입을 때 신는 버선으로 남자아이는 남색천 여자아이는 홍색 천을 버선목에 둘렀다.



돌띠(조선 후기)



첫돌 때 두루마기 등 상의 뒤로 돌려 매는 옷고름으로 십장생이나 덕담을 수놓아 건강하고 복되기를 기원.



두루주머니(20세기)


귀중품이나 소품을 넣어 휴대하는 주머니로 아이들의 한복에 달아주었다.



운혜(1993년 가죽신)



여자들이 신는 가죽신으로 앞코와 뒷축에 구름무늬가 있어 운혜라고 한다.




태사혜(1993년 마른 땅에서 신는 가죽신)



남자들이 신는 신으로 신코 끝 부분에 흰 줄무늬가 장식돼 있어 태사혜라고 한다.



나막신(조선 후기)



나무를 파서 만든 신으로 앞뒤에 높은 굽이 있어 비가 오는 날이나 땅이 진 곳에서 신었다.



오방장 두루마기(조선 후기)



남자 아이가 입는 오색 두루마기로 아동용 두루마기를 까치두루마기라 한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액을 막고 장수를 염원하는 뜻에서 색동으로 만들었다.



색동저고리(1991년)



여자아이 돌복으로 소매를 색동천으로 만든 겹저고리다.







윤리교육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인 윤리 교육을 통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국가에서는 효자, 충신, 열녀를 표창하고 삼강행실도 등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


오륜은 삼강의 윤리를 포함해서 어른과 어린이, 친구 사이에 지켜야 할 의리.







관례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남자는 '관례', 여자는 '계례' 성인식을 치렀다.



남자는 20세 전후에 집안 어른들 앞에서 상투를 틀고 치포관, 유건, 갓 등을 차례로 쓰며 성인 이름인


자를 받는 관례를 행하였다.



여자는 15세 전후에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했는데 혼례로 성인식을 대신해 혼례 전에 행하였다.


관례와 계례가 끝나면 조상이 계신 사당에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고 집안 어른과 이웃들에게 인사를 했다.







혼례



조선시대는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사회로 중매결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중매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 월, 일, 시간을 적은 사주단자로 궁합을 맞추고 혼사가 정해지면


혼서지와 예물을 담은 납폐함을 보내 약혼을 증명하였다.



혼인 절차는 신랑이 신부집에 나무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하는 교배례,


합환주를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에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초례를 치르는 친영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우리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초례를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친영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혼례식을 치르는 것.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가례의 혼례 절차와 재래의 관행이 절충돼 신랑이 신부 집에서 초례를 행하되


당일이나 3일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폐백을 올리고 인사를 하였다.












납폐



혼사가 정해지면 신랑 집에서는 약혼의 표시로 혼서지와 함께 신부 치맛감 등 혼수품과 그


내역을 적은 물목단자를 납폐함에 담아 신부 집에 보냈다.



납폐함은 혼인을 상징하는 예물로 ‘자손번창’이나 ‘가내평안’을 뜻하는 ‘수복’ 문자와 박쥐 문양으로 장식.


함은 '함진아비'가 보통 첫아들을 낳은 복 많은 사람이 지게 하였고 신부 측에서는 함에 손을 넣어 처음


잡히는 옷감 색에 따라 부부의 장래를 점치기도 하였다.












초례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 절하고 서로 합환주를 마시는 예식을 초례.


예식을 치르는 곳을 초례청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래의 관행에 따라 신부 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차렸다.


초례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음양의 화합을 상징하는 청색, 홍색의 촛대, 솔가지와


대나무, 수탉, 암탉, 밤, 대추, 붉은 팥, 검은콩 등을 차렸다.



초례청에서는 창홀(진행자)이 초례상 뒤쪽에 서서 홀기(식순)에 따라 혼례식을 진행하는데 음양의


원리에 따라 신랑은 동쪽에 서며 신부는 서쪽에 서서 예식을 행하였다.












신부가마



혼례를 마친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는 신행에 신부는 화려하게 꾸민 사인교(가마)를 탔다.



가마 위에는 나쁜 액의 접근을 막기 위해 호랑이 가죽을 덮었는데 없을 경우에는 호피 무늬 이불을


얹었고 가마 안 방석 밑에는 액을 쫓는다는 숯과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목화씨를 놓았다.







가족



성산이씨 응와 이원조의 가족 이야기


조선시대에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고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고려 개국공신 이능일을 시조로 하는 성산이씨 집안은 조선 전기에 이우가 경상북도 성주 한개마을로 처음


들어온 이래로 퇴계학을 계승한 이원조(1792~1871)가 증조할아버지 이석문(1713~1773)의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과 할아버지 이민겸(1736~1807)의 ‘대대로 책 읽는 씨앗이라는 가르침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성산이씨 세계와 족보



족보는 한 집안의 계통을 기록한 책.



성주 한개마을 성산이씨는 고려 개국공신 이능일을 시조로 이여량을 정언공파 파조로 이우를 입향조로 여긴다.


그래서 성산이씨족보에서는 정언공파로 분류된다.








이원조의 유훈



이원조(1792~1871)는 1809년(순조 9)에 1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판서 등


내직과 제주 목사 등 외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중앙과 지방에서 벼슬하면서 수많은 학자들과 더불어 학풍과 당색을 넘어선 교류를 하였고


은거한 이후에는 주로 한개마을과 가야산 만귀정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응와종택의 서화와 현판



이원조(1792~1871)는 선대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녀들의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그림, 글씨 등의 서화와 현판을 직접 쓰거나 수집하였다.




이원조의 아들과 손자



이원조는 이정상(1808~1869), 이기상(1826∼1903), 이구상(1829~1890)의


세 아들과 이관희(1824~1895), 이달희(1843~1912) 등의 손자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집안 선대의 ‘대대로 글 읽는 씨앗이라는 가법을 받들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를 계승하면서 형과 아우, 삼촌과 조카 등 가족 간에 스승과 제자가


되어 당대에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그리고 생가 조카인 이진상(1818~1886)과 종손자인 이승희(1847~1916)는


이원조의 학문과 성산이씨의 가학을 계승하여 ‘한주학파’라는 당대의 일가를 이루었다.












문중행사를 통한 ‘효’의 실천



이원조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가르침을 가법으로 삼아 실천하면서 문중의 교육에 힘쓰며


조상의 묘소 관리 및 제례에 정성을 다하기 위해 문중 계모임을 하였다.



이들은 조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곧 ‘효’의 실천이라 여겨 성주 한개마을에 이석문과 이원조의


신도비를 세우거나 문집을 간행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매년 응와 이원조의 불천위제 및 묘제 등의


행사에 참여하여 조상의 덕을 기리고 있다.







출세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만 법적으로는 과거 시험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음직이라 하여 조상의 공으로 벼슬에 오르기는 했지만 과거시험을 거쳐 벼슬에 오르는 것을 가장


정상적인 출세로 여겼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사회에서는 무관보다 문관을 우대하였다.


그래서 문관으로서의 출세는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유교적 소양을 지녔던 관료들은 왕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도리로 여겨 목숨을 걸고 왕에게 충언을 하기도 했다.




등용문



등용문은 큰 물고기가 물살이 세고 거친 중국의 용문에 뛰어올라 용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과거 급제가 입신출세의 관문이었으므로 이는 곧 등용문을 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과거 시험이 출세길이기 때문에 잉어를 새긴 벼루나 잉어가 뛰어오르는 그림인 약리도나


연리도를 공부방에 걸어두고 과거 급제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무관



무관은 병서와 활쏘기 등의 무예 기술을 시험하는 무과시험 출신의 관리.



무관은 법제상으로 문관과 동등하였지만 무관은 정 3품 절충장군까지만 올라갈 수 있어서


이들의 우두머리는 모두 문관이 겸직하였다.



무관직은 비록 문관직에 비해 차별을 받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매년 실시된 무과시험과


완화된 응시 자격 등으로 하층민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문관



문관은 유학 경전에 대한 지식과 논술을 시험하는 문과시험 출신의 관리.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유학을 숭상하여 무관보다는 문관을 우대하였다.


문관은 최고 정 1품 영의정까지 올라 조정의 인사권뿐만 아니라, 군사 지휘권까지도 장악하였다.


그래서 문과 시험을 거쳐 문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최고의 출세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초헌



조선시대에 종 2품 이상의 관리가 타던 수레로 명거, 목마, 초거, 헌초라고도 한다.


고위 관리의 위세를 상징하던 초헌은 가마와 비슷한 형태이지만 채가 아주 길며 외바퀴가 밑으로


달려 있어서 보통 여섯 사람에서 아홉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다.










만인산



만인산은 고을 사람들이 지방관리의 공덕을 기리며 감사의 표시로 바친 일산.



전 고을 사람의 이름을 새겨 바친 일산이라 하여 '천인산' 또는 '만인산'이라 하며 비단에 각자의


이름을 자수로 놓았다고 해 수산이라고도 한다.



일산은 원래 수령이나 감사가 외직으로 나갈 때 햇볕을 가리는 의장의 하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송덕비와 함께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품이 되었다.







패옥과 후수



패옥과 후수는 조복이나 제복 등의 예복을 입을 때 옆과 뒤에 차는 의례적인 장식으로


흉배와 더불어 관직의 등급을 나타냈다.



패옥은 관직에 따라 3품 이상은 청옥, 4품 이하는 백옥을 찼다.


후수는 관직에 따라 색채의 배합과 수의 무늬, 거기에 매단 환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패옥과 후수는 후대로 오면서 품계 구별보다는 예복의 장식물로 의미가 바뀌었다.


























풍류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일상생활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휴식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산속 초당에서 홀로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시를 읊거나 친척, 친구들과 노래와 춤으로 친목을 다졌다.


판소리나 거문고 같은 악기 연주를 감상하며 술을 마시거나 시를 주고받고 그림도 감상하면서 소양을 길렀다.


또한 바둑, 장기, 투호 등으로 여가를 즐기며 산과 들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심신을 단련하였다.










놀이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일상생활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놀이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사랑방이나 경치 좋은 정자나 야외에서는 바둑, 장기, 투호 등으로 여가를 즐기고 산과 들에서는


활쏘기를 하며 심신을 단련하였다.













활쏘기



활쏘기는 일정한 거리에 과녁을 세워 놓고 활을 쏘아 맞히는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 놀이.



예부터 활쏘기는 ‘사예’라고 하여 사대부가 반드시 익혀야 할 무예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활쏘기는 단지 심신을 단련할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덕행을 수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일상에서 벗어나 활쏘기로 사냥을 즐겼고 마을마다 ‘향사례’라는 활쏘기 의식을 치르면서 친목을 도모.










서화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학문적 수양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출세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시, 서, 화 모두에 능한 것을 최고의 재주로 여겼다.



시나 글을 쓰는 것은 관직 생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이었지만 자기의 감정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도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 여겼다.



사대부들은 종종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경치 좋은 곳에서 서로 글을 주고받거나 그림을 감상하면서 서로


기량을 겨루었으며 이러한 모임을 기념하여 서화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회갑



조선시대에는 집안 어른의 만 60세 생일이 되면 회갑 또는 환갑이라 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60세 이상은 장수를 뜻하므로 자손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겨 생일을 기념했다.



잔칫날에는 '백수백복도' 등의 병풍을 치고 회갑상을 차려 집안 어른의 장수를 축하하고


술을 올리고 절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침구



인체에 5장 6부가 있어서 기능이 서로 조화되면 건강하지만 조화가 깨지면 병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여겼다.



해당 경락의 경혈을 골라 막힌 기와 혈을 풀어주면 장부의 기능도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해 침을 놓아 치료했다.


주요 반응점(365경혈)및 반응점을 연결한 경로(14경락)를 표시한 인체도와 사람 형상을 만들어 침술을 익혔다.






















한약방



한약방은 의원이 약물과 침구술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원 겸 약방.



조선시대에는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이 편찬되어 민간에 보급되고 침구술의 발달과 함께


사람의 체질을 네 가지로 분류한 사상 체질 의학이라는 새로운 의학이 나와 우리의 독자적인


의학기술로 한약방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굿청



특별한 치료법이 없던 조선시대에 천연두와 홍역은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다.


예방하거나 다스리기 위해 무당을 불러 별상굿이나 호구굿을 하고 마을에서는 마마배송굿을 했다.



홍역을 다스리기 위한 호구굿 모습


무당이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왼손에는 방울을 흔들며 굿하는 장면을 재현.







주술과 점복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할 때 행하는 원초적인 술법이 주술.



주술은 세시 풍속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기 위해 무당의 능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귀신이나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기 위해 부적을 쓰기도 하였다.



앞일을 미리 알기 위해 점통의 내용으로 점을 치는 작괘점이나 사람의 얼굴과 손금으로 사람의 일생을 판단하는


관상점 등을 보았다.







상여



상여는 상례 때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규모에 따라 대여, 소여라고 한다.


상여는 원래 소나 말, 또는 사람이 끄는 수레였으나 주자가례를 수용하면서 어깨에 메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여의 형태는 가마와 비슷하나 몸체 좌우에는 멜채가 있어서 형편에 따라 12인 또는 24인까지 맬 수 있다.


상여는 대개 마을마다 마련하되 상여틀을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상엿집에 보관하였다.







수의



수의는 상례 절차 가운데 시신을 목욕시키고 나서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



수의는 보통 생전에 입던 예복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새로 옷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새로 수의를 제작할 때에는 생전의 옷보다 크게 하였고 색깔은 염색하지 않은 소색을 쓰지만


평상시 예복과 같이 화려한 색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의를 미리 만들어놓으면 장수한다는 속설에 따라 부모님의 회갑이 가까워지면 윤달을 택하여


수의를 준비하거나 장수하는 노인을 모셔다가 바느질을 부탁하기도 했다.







명기(부장품)



명기는 무덤 안에 죽은 사람과 함께 넣어 매장하는 부장품을 말한다.



죽은 자를 위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묻는 것으로 ‘명기’라 하였다.


나무나 흙으로 추악하고 작게 만든다고 하였는데 품계에 따라 그 수를 달리하고 재질도 다양하게 했다.







삼년상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 3년 동안 부모에 대한 보은과 효도를 다하고자 삼년상을 지냈다.



장사를 마친 후에도 상청 영좌에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는 등 마치 살아 계신 듯이 섬겼다.



외출할 때에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여겨 방갓을 썼다.


삼년상이 끝난 이후에도 자식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사를 지냄으로써 부모에게 못다 한 효를 하였다.










사당



사당은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곳.



사당은 대체로 집의 동쪽에 있으며 사당 안에는 서쪽부터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그리고 동쪽 끝에 부모 신주를 모셨다.



사당에서는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 고하거나 매달 초하루와 보름, 설, 추석 등의 명절 때 차례를 지냈다.









안동 권씨 충재 권벌 종가 제사상



경상북도 봉화군 안동 권씨 충재 권벌(1478~1548) 선생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을 재현.



충재 종가 불천위 제사상의 특징은 일반적인 시루떡이 아닌 12가지 떡을 층별로 쌓아올린


잔절편을 사용하며 강정도 이 마을의 전통 유과인 오색강정을 사용한다.
















기증자의 벽



국립민속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해 준 기증자들의 명패를 새겨서 기증자에 대한 예우 및


기증 문화의 확산을 통한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 증진하기 위해 설치한 벽.






























기억의 공감



2016년에 기증받은 대표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이들의 기억이 담긴 기증품들을 통해 기억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소중한 사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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