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눈을 뜬 듯이 눈을 감았습니다

하늘빛이 땅 위에 하얀 구름을 덮었습니다.

쪼르륵 얼음을 녹이는 개울물 소리

원시적 풍경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 발자국 뒤에 어머니 발자국

오빠 발자국 뒤에 언니 발자국

내 동생 발자국이 하얀 눈 위에

장유유서의 위계질서가 걷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으로 까치는 아침을 깨우고

밤새 뛰어놀던 토끼와 노루

이솝의 꿈속에서

고요한 들녘은 얼키고 설켜

삶의 꿈틀거림을 모두 덮고

하얀 백지 위에 꼬마들이

송이송이 눈송이를

까부라치며 다시 주어 까부라치는 모습

유년 시절 추억이

눈앞에서 목화꽃처럼 피어납니다.

제 몸을 태우는 빛은

따뜻한 바람 불어 녹이고

숨겨두었던 질경이의 오늘은

백지 위에 낙서를 하며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이종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