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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시모음 30편/그도세상
11 그도세상김용호 2020.10.29 02:25:28
조회 95 댓글 0 신고

이수익시모음 30편
☆★☆★☆★☆★☆★☆★☆★☆★☆★☆★☆★☆★
《1》
5월 나무처럼

이수익

사춘기
소년소녀들처럼
5월 나무들은 성큼 푸르러
녹음 연대連帶를 이루기 시작하느니.

그렇게 뿜는 힘 도도하고
하늘로 솟을 듯 즐겁고
당당해,
세상이 마치 저희들 것처럼

그 나무들 바라보며
차츰 엽맥들 무성하게 피어나면
내 눈엔 띄지 않을 그들만의 비밀세계
늘어날 6월 오고, 또한 7월 올 것임을

나는 생각하네, 내게도 아름다웠던
지나온 길들을.

☆★☆★☆★☆★☆★☆★☆★☆★☆★☆★☆★☆★
《2》
가을 편지

이수익

네가 오는 것은
눈물겨운 기다림만으로 족하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이별은 상처처럼
깊이 두렵고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너는 왔다간 금세 가야 하니까

내 마음 위로 한닢 바람기 같은
뜬소문 같은 흔적이나 남겨 놓고
머물렀던 몇날 밤 쌓아올린 정분도 미련 없이
서둘러야 하는 발걸음처럼, 총총 떠나 버리는 너,

그래도 너를 기다리던 지난 여름 숱한 날들은
달력에 금을 긋고 바닷물의 간만을 지켜보며
한없이 즐겁고 떨리기만 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더 이상 바람이란
품어서는 안 될 허튼 나의 욕심
네가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대,

아, 젊은 情夫처럼
잠시 머물렀다간 훌쩍 가 버리는
가을,
☆★☆★☆★☆★☆★☆★☆★☆★☆★☆★☆★☆★
《3》
견인되다

이수익

견인차가
불법주차 승용차 한 대를 끌고 불이 난 듯
급하게 달려간다.
앞 범퍼가 견인차 후미에 덜컹, 얹힌
승용차는
제 주인에게 피랍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어디론가 행방이 감춰지고 있다.

죄를 지었으므로
체신은 볼품없이 구겨졌으면서도
두 손이 단단하게 결박당한 채
견인차가 가자는대로
가고 있다.

내 죽은 다음
저승사자가 내 생애의 죄를 물어 저렇게
유계(幽界)의 사방천지를 끌고 다닌다면,
어쩌지?
꼼짝없이 사지를 포박당한 채.
하긴 살아서도 지금까지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론가, 어디론가
끌려오긴 했지만.
☆★☆★☆★☆★☆★☆★☆★☆★☆★☆★☆★☆★
《4》
결빙의 아버지

이수익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 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 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랭이 사이로 시린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零下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
《5》
고별

이수익

그때 잘 죽었지
젊은 나사렛 그 사람
오늘도 나는 등허리에 솜을 실은
나귀의 지혜가 되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종로로 간다.
무엇일까
잃어버린 그것은,
사랑일까 기억일까
독을 뿌린 별의 죽음일까
눈앞에서 아찔
정말 잘 죽었지
그때 젊은 친구 나사렛
피와 모래를 노래하다 나는
골수를 다친 채
종로의 어느 밝은 상점 앞에서
시방 비를 맞는데
웬일일까 자꾸 웃음이 터지는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는,
어머니도 아니다 누이도 아니다
그렇지 참 잘 죽었지
젊은 나사렛 자네
얼굴이 타도록 술을 마시고
납덩이보다 무거운 솜을 진 채
긴 벽을 돌아선 종로에
종로에,
가려운 피부엔 돋는 부스럼
그때 잘 죽었지
정말 한이 된다.

출처 : 《1963년 신촌문예 당선》 시
☆★☆★☆★☆★☆★☆★☆★☆★☆★☆★☆★☆★
《6》
과수원

이수익

1
과수원에 가면
나도 한 마리 벌레가 되고 싶다

해맑은 아침이슬 먹고
푸른 달빛 먹고
흠뻑 향기가 무르익어가는
과일과 과일,
그 열망에 빛나는 눈빛 사이를
느리게, 아주 느리게
기어다니고 싶다

2
과수원에 바람 부는 날은 잎새에 매달려 춤이나 추고
과수원에 비 내리면 후둑후둑 빗소리에 가슴을 열고
과수원에 번개치면 날은 깜깜한 맹목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나도 자랄 것이다. 조금씩 키가 크는 아이처럼

3
그리고 마침내
단물이 흘러넘쳐 무거워진
과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뚜우뚝
떨어져내리면
나도 떨어져 스밀 것이다, 부드러운 흙 속에
내 향기로운 몸을 묻으면서
☆★☆★☆★☆★☆★☆★☆★☆★☆★☆★☆★☆★
《7》
그리고 너를 위하여

이수익

타오르는 한 자루 촛불에는
내 사랑의 몸짓들이 들어있다.
오로지 한사람만을 위하여
끓어오르는 백열의 침묵 속에 올리는 기도,
벅찬 환희로 펄럭이는
가눌 길 없는 육체의 황홀한 춤,
오오 가득한 비애와 한숨으로 얼룩지는
눈물,
그리고 너를 위하여
조금씩 줄어드는 내 목숨의 길이.
☆★☆★☆★☆★☆★☆★☆★☆★☆★☆★☆★☆★
《8》
그리운 악마

이수익

숨겨 둔 정부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
《9》
꽃은 부드럽지 않다

이수익

꽃은 네가 말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추상이
아니다.

꽃은 지금
절박한 실존으로
제 생의 위태로운 극단 위를
피고 있다.

꽃이란 꽃 저마다 다른 꽃을 딛고
우우우, 봉우리를 높이 일으켜 세우고 있는

치열한 경연과도 같은,
꽃들의 광장으로 가서 보라.

층층이 만발한 그들은
저 하나 우뚝 피어나기 위해 옆옆의 꽃을
밀치고 누르거나
혹은 짓밟으며
불꽃 튀는 관능의 빛깔과 향기와 자태를
하늘 가운데 드러내려 하고 있다.

아, 실은
꽃들은
저리도 제 피를 말리면서
시들고 있다.
☆★☆★☆★☆★☆★☆★☆★☆★☆★☆★☆★☆★
《10》
나에겐 병이 있었노라

이수익

강물은 깊을수록
고요하고
괴로움은 깊을수록 말을 잃는 것.

다만 눈으로 말하고
돌아서면 홀로 입술 부르트는
연모의 질긴 뿌리 쑥물처럼 쓰디쓴
사랑의 지병을,

아는가...... 그대 머언 사람아.
☆★☆★☆★☆★☆★☆★☆★☆★☆★☆★☆★☆★
《11》
나의 자유

이수익

저 집들은
구중궁궐이다
우뚝하니 서서 아래쪽을
아득히
굽어보고 있다

나는 저 집밖을 기웃거리지 않으리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서 엄숙한 체
지나가면서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무정하게도

성북동 또는 한남동 근처에 있는
완성된 성곽처럼 하늘을 높이 받들고 있는 집들은
과연 민주주의적이다, 가진 자와 안 가진 자를
뚜렷하게 구분하려는 듯
그들만의 세련된 기품과 차가운 냉정함을
깊이 유지하려는 듯이,

나는
눈먼 개처럼 멀리 떨어져서
지나온 길들을 따라서 거듭 전진할 것이다
나의 자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듯,
외면(外面)을
치장처럼 휘날리면서
☆★☆★☆★☆★☆★☆★☆★☆★☆★☆★☆★☆★
《12》
들고양이

이수익

놈은 필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격랑에 치여
원통하게
한을 품고 숨진 어느 사대부의
넋의 재현임이 분명하다

밤의 컴컴한 화단이나
아파트 주차장 숨죽인 차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는, 무슨 자객 같은
놈은 나와 맞닥뜨리는 순간 멈칫하는 듯도 싶지만
그러나 결코 도망가는 법 없이, 민첩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면서

이제는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보복하리라는 일념만이
놈의 저 검은 등줄기 위로 털을 꼿꼿이 서게 하고
적의에 떨리는 몸을 바짝 웅크리게 하고
동그란 두 눈엔 인광처럼 새파란 불을 켜서
저주의 불꽃을 날리게 만드는 것이다. 들고양이

오늘밤에도 삼생(三生)을 건너뛰며
어둠의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불운한 피의 테러리스트.
☆★☆★☆★☆★☆★☆★☆★☆★☆★☆★☆★☆★
《13》
또 다른 생각

이수익

뭉개지는 것도 방법이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각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다. 선창에서
기름때 묻은 배끼리 서로 부딪치듯이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조금 얼룩도 생기듯이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자, 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취한 기분에 붙들려 소리를 버럭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시간도 참으로 소중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도 소중하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 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 구역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은
네게는 매우 소종한 덕목이다.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경계하고 저주하라, 그대
불행한 시인이여.
☆★☆★☆★☆★☆★☆★☆★☆★☆★☆★☆★☆★
《14》
마른 손

이수익

나의 손은 바싹
말라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잡으려고 했던 것일까
너무 힘겹게 움켜쥐려고 했던 것일까
가지런히 손을 펴놓고 보면
울퉁불퉁 스쳐간 산맥들이 험악하게 지형을 이루고 있다.
손바닥에는
무슨 잡히는 것이라곤 없다.
허무의 벌레가 기어간 자리가 폐허처럼, 폭설처럼
우뚝 서 있다.
내가 지나온 자리가 이렇다, 평생 쌓아온
텅 빈자리가 바로 내 것이라는 듯
그렇게, 신神을 향하여 돌려드리자.
아무 것도 지닌 것 없는
생生의
순수한 반환이여.
☆★☆★☆★☆★☆★☆★☆★☆★☆★☆★☆★☆★
《15》
봄날에

이수익

봄에는
혼자서는 외롭다, 둘이라야 한다, 혹은
둘 이상이라야 한다.

물은 물끼리 만나고
꽃은 꽃끼리 피어나고
하늘에 구름은 구름끼리 흐르는데

자꾸만 부푸는 피를 안고
혼자서 어떻게 사나, 이 찬란한 봄날
가슴이 터져서 어떻게 사나.

그대는 물 건너
아득한 섬으로만 떠 있는데…….
☆★☆★☆★☆★☆★☆★☆★☆★☆★☆★☆★☆★
《16》
사진사

이수익

처음엔 버릴 것부터
잘라가면서
나중에야 나무의 미학을 손질하는
園丁(원정)의
剪枝作業(전지작업)처럼.

시야에 비친 풍경 속에서 寫眞師는
먼저
버릴 것부터 생각한다.

버리고 버리고 버리다가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一瞬(일순) 交感(교감)을 영상에 담으면
나머지 공허한 虛像(허상)의 풍경들이
울음 우는
카메라의 저 바깥 外界(외계)
☆★☆★☆★☆★☆★☆★☆★☆★☆★☆★☆★☆★
《17》


이수익

한 마리의 새가
공중을 날기 위해서는
바람 속에 부대끼며 뿌려야 할
수많은 열량들이 그 가슴에
늘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보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은
노래로써 그들의 평화를 구가하지만
그 조그만 몸의 내부의 장기들은
모터처럼 계속 움직이면서
순간의 비상 이륙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오, 하얀 달걀처럼 따스한 네 몸이 품어야 하는
깃털 속의 슬픈 두근거림이여
☆★☆★☆★☆★☆★☆★☆★☆★☆★☆★☆★☆★
《18》
수선화·2

이승익

서울 우이동에서 마음씨 곱기로 소문난
이 생 진 선생님
식산봉 아래 부끄러이 자고있는 통나무집 한켠에
물맛 좋은 제주생수병에 수선화 꽂아놓아
서울 우이동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수선화는 슬피 울고있다
수선화는 말을 잃은 것 같다
수선화는 생기가 없다
수선화는 졸고있다

아마도
수선화는 선생님 마음이 너무 그리워
하루 이틀 온몸을 바르르 떨다
끝내 자결한 모양이다
☆★☆★☆★☆★☆★☆★☆★☆★☆★☆★☆★☆★
《19》
안개꽃

이수익

불면 꺼질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듯
안개처럼 자욱이 서려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련(初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형상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 로 그 꽃
☆★☆★☆★☆★☆★☆★☆★☆★☆★☆★☆★☆★
《20》
연꽃

이수익

아수라의 늪에서
오만 번뇌의 진탕에서
무슨
저런 꽃이 피지요?

칠흑 어둠을 먹고
스스로 불사른 듯 화안히
피어오른 꽃.

열번 백번 어리석다,
내 생의 부끄러움을 한탄케하는
죽어서 비로소 꽃이 된 꽃.
☆★☆★☆★☆★☆★☆★☆★☆★☆★☆★☆★☆★
《21》
열애

이수익

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외도(外道)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
《22》
우울한 샹송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흔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 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 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
《23》
이름을 지우면서

이수익

나는 오늘 문인주소녹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다.
사람 하나를 지우기란
너무 쉬워. 볼펜으로 줄긋기, 또는
살 빠진 가랭이에 묵은 바지를 끼워 입기.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대뇌 깊숙이 꽝 꽝 몇 개의 굵은 못을
박았다, 사납게. 그를 생각하면
갑자기 우리가 함께 씹던 빵이 가슴에서
부풀어오르고, 잔을 건네며 마시던 술
피가 된 그 술이 다시 한번
나를 취하게 만들므로.

그의 눈이 빛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마침내 깜깜한 어둠의 돌로 굳어졌듯이
그의 하얀 몸으로부터 영혼이 떠나면서
그리운 불빛 같던 우리의 옛 추억도
떠나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오늘 추억에 관하여
비겁해지기로 했다.
☆★☆★☆★☆★☆★☆★☆★☆★☆★☆★☆★☆★
《24》
잃어버린 사랑의 비애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시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웢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
《25》
자화상

이수익

제 몸을 부수며
종鐘이
운다

울음은 살아 있음의 명백한 증거,
마침내 깨어지면 울음도 그치리.

지금
존재의 희열을 숨차게 뿜으며
하늘과 땅을 느릿느릿 울려터지는

종소리,
종소리,
그것은 핏빛 자해自害의 울음소리.
☆★☆★☆★☆★☆★☆★☆★☆★☆★☆★☆★☆★
《26》
잠시 지나가는

이수익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귀신이 앞을 가로막고 선 듯
날카로운 속성의 끔찍한 징후들이 몇 초간 이어졌다

액자 속의 여자가 하얗게 웃었다

나는 그때서야 고개를 내밀고서
난간 저 아래로 굽이치는 사람들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검은 상복을 입은 무리들이 춤추며 노래하다가
서로서로 어울리는 모습들이 대낮 같았다

처음으로 꽃들이 물들면서
환히 피어났다
머무르지 않고서, 잠시 지나가는
☆★☆★☆★☆★☆★☆★☆★☆★☆★☆★☆★☆★
《27》
차라리 눈부신 슬픔

이수익

신(神)은
이 아름다운 며칠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애의 절정을 온몸으로 태우며
떨기떨기 피어 오른 하얀 목련
꽃잎들, 차라리 눈부신 슬픔으로 밀려드는
봄날!

나머지 길고 지루한 날들 열려 있어
이 황홀한 재앙의 시간도
차츰 잊으리.
☆★☆★☆★☆★☆★☆★☆★☆★☆★☆★☆★☆★
《28》
천 년의 사랑

이수익

산이
깊은 호수에 잠겨 있습니다.
호수가 산을 그 가슴으로 조용히 끌어안고 있습니다.
천 년 세월 그러합니다.

이따금
선착장을 떠난 쾌속보트가 흰 물보라를 날리며
호수 위를 씽씽 달립니다.
천 년 호수의 눈동자에 한 줄기 그림자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잠시…… 그뿐입니다.

다시 산이
깊은 호수에 잠겨 있습니다.
호수는 지아비를 우러러보는 지어미처럼
산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交合의 풍경입니다.
☆★☆★☆★☆★☆★☆★☆★☆★☆★☆★☆★☆★
《29》
추락을 꿈꾸며

이수익

최고봉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룸으로써
하늘의 뜻과 가까워지려는 듯,

萬年雪 덮인
해발 4,478미터의 마터호른 山은
오늘도
은빛 낭떠러지 빙벽에 매달린
알피니스트들을 조용히 거부하듯 밀어 내지만

저 죽음의 향기에 마취된 이들은
벼랑이 뿜는 현란한 추락의 상상력에 몸을 떨며
天刑처럼 암벽을 기어오른다.

세상의 때를 묻히고 싶지 않은
고고한 山이 날카롭게 세우는 죽음의 벼랑 아래로
아득하게,

죽음에 취한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
《30》
한잔의 기쁨 위에

이수익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봄풀이 돋아나도 그렇고
강물이 풀려도 그렇다
말없이 서러운 것들
제가끔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이 길목의 하루는
반가움에 온몸이 젖어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람같이 언덕을 달리고 싶다
오오, 환생하는 것들 어리면 어릴수록
약하면 약할수록
나를 설레이게 하는
만남의 희열이여, 무한 축복이여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한잔의 기쁨 위에
또 한잔의 슬픔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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