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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자시모음 29편/그도세상
11 그도세상김용호 2020.10.18 02:55:54
조회 137 댓글 0 신고

허영자시모음 29편
☆★☆★☆★☆★☆★☆★☆★☆★☆★☆★☆★☆★
《1》
가을 기도

허영자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
《2》
가을비 내리는 날

허영자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 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
《3》


허영자

이 맑은 가을 날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
《4》
겸손한 사람은 참 아름답다

허영자

겸손이란
참으로 자신 있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인격이다.

자신과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열등 의식이나 비굴감은 있을지언정
겸손한 미덕을 갖추기 어렵다.

겸손은 자기를 투시할 줄 아는
맑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한계를 알고
한정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영원 무변성과를 대비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만이 겸손할 수가 있다.

또한 겸손은 생명 있는 모든 것,
혹은 무생물의 모든 것까지
애련히 여기는 마음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함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뜻,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모두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겸허함을 가진 이의 삶은 경건하다.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함부로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며,
운명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사랑함으로써 극복하는 이이다.

그런 사려 깊은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5》
그대의 별이 되어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
《6》
꽃피는 날

허영자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 달 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魂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문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
《7》
나목에게

허영자


캄캄한 밤은
무섭지만

추운 겨울은
더 무섭지만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

이 단순한 순환이
가르치는 지혜로

눈물을 닦아라
떨고 섰는 나무야.
☆★☆★☆★☆★☆★☆★☆★☆★☆★☆★☆★☆★
《8》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
《9》
내 속에

허영자

천둥소리가
내 속에 있었으면……

세상살이에 지쳐
고단한 나의 영혼
간사스럽고 비굴해
그만 무릎 꿇으려 할 때
스스로 우는 자명고처럼
천둥소리 큰 꾸중 있었으면

번갯불이
내 속에 있었으면……

자잘한 일에 울고 웃는
소인배 되어
얼굴 붉히고 다툼질할 때
천만 도의 저 불로 담금질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면
아아
한 그릇의 정갈한 정화수가
내 속에 있었으면……

때묻어 더러워지는
내 얼굴 내 손
나날이 쌓이는 아집과 노욕
찬물로 맑게 헹구어내어
새로 씻은 빨래처럼
깨끗해질 수 있었으면
☆★☆★☆★☆★☆★☆★☆★☆★☆★☆★☆★☆★
《10》
너무 가볍다

허영자

나 아기 적에
등에 업어 길러주신 어머니

이제는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너무 조그맣다
너무 가볍다
☆★☆★☆★☆★☆★☆★☆★☆★☆★☆★☆★☆★
《11》
떡살

허영자

고운 네 살결 위에
영혼 위에
이 신비한
사랑의 문양 찍고 싶다

'이것은 내 것이다'

땅속에 묻혀서도
썩지를 않을
저승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표적을 해두고 싶다
☆★☆★☆★☆★☆★☆★☆★☆★☆★☆★☆★☆★
《12》
마중물

이영자

언제나
좋은 면만 보려고
감사한 것만 생각하려고
애쓰는 당신
당신은
행복을 펌푸질 하려고
내 가슴에 부어 놓은
마중물 입니다.
☆★☆★☆★☆★☆★☆★☆★☆★☆★☆★☆★☆★
《13》
무지개를 사랑한 걸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14》
민들레

허영자

누가 불렀니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저절로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

해질녘
골목길에 울고 섰던
조그만 애기

두 눈에
눈물 아직 매달은 채로
앞니도 한 개 빠진 채로
대문을 열고 들어섰구나

만 가지 꽃이 피는
꽃밭을 두고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환하게 불을 켠
노오란 민들레
☆★☆★☆★☆★☆★☆★☆★☆★☆★☆★☆★☆★
《15》
봄밤

허영자

봄밤에는
응달 속에 갇혔던 魂들이
줄줄이 어깨 겯고 살아나와 춤을 추고

속으로 삼킨 울음
몰래 숨긴 사랑도
더는 못 참아 뛰어나와 왜장 치고

참말 어쩔 수 없어라
봄밤에는

엎드린 저 山川도
옷 가슴 풀어헤쳐
거친 잠도 자노니……
☆★☆★☆★☆★☆★☆★☆★☆★☆★☆★☆★☆★
《16》
비 오는 날

허영자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처럼
마음 젖어 서러이 흐느끼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아득히 비 내리는 신비한 바깥
머언 머언 내일을 내다보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박쥐우산 하나를 바람막이로
용감하게 세상을 밀고 가던 그때
☆★☆★☆★☆★☆★☆★☆★☆★☆★☆★☆★☆★
《17》
빈 들판을 걸어가면

허영자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오래오래 마음으로 사모하던
어여쁜 사람을 만날 상 싶다

꾸밈없는
진실과 순수
자유와 정의와 참 용기가
죽순처럼 돋아나는
의초로운 마을에 이를 상 싶다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아득히 신비로운
神의 땅에까지 다다를 상 싶다.
☆★☆★☆★☆★☆★☆★☆★☆★☆★☆★☆★☆★
《18》
씨앗을 받으며

허영자

가을 뜨락에
씨앗을 받으려니
두 손이 송구하다

모진 바람에 부대끼며
먼 세월 살아오신
반백의 어머니 가을 초목이여

나는
바쁘게 바쁘게
거리를 헤매고도

아무 얻은 것 없이
꺼멓게 때만 묻혀 돌아왔는데

저리
알차고 여문 황금빛 생명을
당신은 마련하셨네

가을 뜨락에
젊음이 역사한 씨앗을 받으려니

도무지
두 손이 염치없다
☆★☆★☆★☆★☆★☆★☆★☆★☆★☆★☆★☆★
《19》
어떤 날

허영자

쓸쓸한 날엔
벌판으로 나가자

아주 매 쓸쓸한 날엔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갈잎은 바람에
쑥대머리 날리고

강물을 거슬러
조그만 물고기 떼
헤엄치고 있을 게다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벼 외로이
모여 있는 곳

아직도 채
눈물 그치지 않거든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
《20》
얼음과 불꽃

허영자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얼음과 눈보라를 지니고 있다

못다 이룬 한의 서러움이
응어리져 얼어붙고
마침내 마서져 푸슬푸슬 흩내리는
얼음과 눈보라의 겨울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꿈꾼다

목숨의 심지에 기름이 끓는
황홀한 도취와 투신
기나긴 불운의 밤을 밝힐
정답고 눈물겨운 주홍빛 불꽃을 꿈꾼다.
☆★☆★☆★☆★☆★☆★☆★☆★☆★☆★☆★☆★
《21》
여름 소묘

허영자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
《22》


허영자

꽃아
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
그 어두움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
《23》
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24》



허영자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
《25》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허영자

먼 옛날 하늘이 열리는 날
태벽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베풀어 펼친
거룩한 홍익인간의 정신
그 지혜를 연연히 이어온 반만년입니다

쑥과 마늘
쓰겁고 매운맛을 이겨 낸 힘으로
고난과 고통과 억압과 슬픔의 사슬
아리는 아픔을 견뎌온 이 땅 백성들입니다

비바람 회오리바람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새 문자를 만들어 등불을 밝히고
시와 노래와 춤 청청한 신명으로
가꾸고 다듬어 온 이 나라입니다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그리고 출렁이는 바다여
나무여 풀이여 뭇 짐승이여 벌레들이여 그리고 사람들이여
우리들의 살 속에는 피속에는
흘러간 역사의 솔바람 소리 맑게 배어 있거니

이제 즈믄 해의 닭 울음소리 새벽을 앞두고
백두와 한라가 두 손을 마주잡은 잔치에
둥둥 북소리 높이 올리며
흰옷입고 달려갈 배달 겨레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빛도
우리들 소망위에 영롱히 비치거니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
하늘 중심을 겨누어 활활 타오릅니다
☆★☆★☆★☆★☆★☆★☆★☆★☆★☆★☆★☆★
《26》
자수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낼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
《27》
친전(親展)

허영자

그 이름에
살 속에 새긴다
暗靑(암청)의 文身

不可思議(불가사의)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내 영혼이 고개 숙이는 밤이여
무거운 운명이여

절망의 눈비
회의의 미친 바람도
숨죽여 坐禪(좌선)하는 고요

'사랑합니다'

참으로 큰
슬픔일지라도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살 속에
그 이름 새기며
이 봄밤
눈떠 새운다.
☆★☆★☆★☆★☆★☆★☆★☆★☆★☆★☆★☆★
《28》
피리

허영자

어머니의 뼈는
피리가 되었다

속이 빈 피리
어머니의 뼈는

천파千波 만파萬波
헤쳐온 삶

구십 년 세월을
노래로 푼다.
☆★☆★☆★☆★☆★☆★☆★☆★☆★☆★☆★☆★
《29》
행복

허영자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윗 틈새 같은 데에
나뭇 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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