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day
비망록 - 김경미
100 뚜르 2020.09.25 16:47:31
조회 176 댓글 1 신고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시집『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1989)

 

출처 : 블로그 '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

4
다른 글 추천
페이스북 로그인
꾸미기
제목 작성자 조회수 작성일
[필독] 저작권 관련 게시글 삭제 처리 기준 (2017.02.15 링크 추가)  (22)
좋은글 게시판 이용안내  (15)
사랑은 찬란하여도  file 모바일등록 new 가을날의동화 3 01:05:13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file new 하양 4 00:37:35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file new 하양 4 00:37:30
남을 칭찬할 때  file new 하양 4 00:37:26
송수권시모음 40편/송수권   new 그도세상김용.. 4 00:34:10
김영춘시모음 15편/그도세상   new 그도세상김용.. 7 00:15:58
흔들리면서 피는 꽃   new 강아지 12 00:05:16
운명을 바꾸려면   new 강아지 13 00:04:34
사랑으로 요리하는 내일   new 강아지 13 00:04:04
박명숙시모음 20편/그도세상   new 그도세상김용.. 10 00:00:42
아름다운 결정   new 뚜르 140 20.10.31
10월의 마지막 밤 /반기룡   new (1) 뚜르 132 20.10.31
권세를 쫓는 사람은 만고에 처량하다   new 뚜르 121 20.10.31
어린아이로   new 산과들에 25 20.10.31
오타   new 산과들에 29 20.10.31
  new 산과들에 22 20.10.31
2020년 시월의 끝날!  file new (1) 62 20.10.31
보름달(blue moon)   new 23 20.10.31
♡ 건강하라 모든 것이 기쁨으로 보인다   new (4) 청암 140 20.10.31
마음으로 지은 집   new 네잎크로바 116 20.10.31
글쓰기
 
행운의 다이아몬드~ 클릭하시면 포인트 5점을 드려요~
Copyright ⓒ EZHLD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