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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겨울 밤에 時 쓰기'
16 나비샘 2020.01.15 05: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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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불 갈아보았는가? 

겨울 밤 세시나 네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 수출자유지역 귀금속 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하고 왔거나
술 한잔하고는 조도 S 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 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등바등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 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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