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둔산역 / 김정한

너무 오래 침묵하는 건 아닌지, 내 안에 환했던 너, 아물아물 거리는 한 줌의 빛 안고 그리움 앞세워 길 떠난다. 샹들리에처럼 환하게 살자는 약속, 쓸쓸한 바람이었을까. 세상의 가난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언약, 물거품이었나. 이해할 수 없는 부호들이 허공을 춤춘다.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아져, 이런 나조차 읽을 수가 없구나. 오래오래 불 끄지 않고 곁에 있겠다던 약속, 쓸쓸한 바람이었을까. 어둠이 한 줄씩 금을 그으며 경계선을 만들 때마다, 지워지며 출렁이는 너, 굶주린 하루가 어둑어둑 힘없는 것들을 집어삼키고, 뜻 모를 글자가 하나씩 이어 붙고 있지만, 나는 해독할 수가 없구나. 바로 누워도 모로 누워도 비뚤 한 세상,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늘로 고개 들면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 물음표가 쏟아져 내린다. 너를 기다리고 나를 기다리는, 빗물에 말갛게 씻긴 둔산역 대합실에는 썩지 않는 바람을 타고 온, 하얀 비둘기 한 마리 주변을 서성댄다. 당신, 어디 가시게요?

김정한 신작 산문집 [나는 이별하는 법을 모르는데 이별하고 있다 p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