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라는 걸 해야할 때, 책이 내어준 향기는 길이 된다 / 김정한

인제 원대리 숲으로 들어가, 바람에 흔들리는 자작나무를 보며,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 산딸기를 따 먹고, 계곡 물 흐르는 소리 들으며, 책을 읽다 보면, 내일로 굴러가던 머리도 잠시 정지된다. 유유히 흐르는 좌표 없는 풍경, 번져가며 긴 그림자 남기며 낙하하는 태양, 모두가 잊지 못할 풍경이다. 그 풍경 하나가, 지치고 힘들 때 꺼내보면 흐뭇하다. 비릿한 욕망을 친친 감고 그러데이션처럼 걸어가는 육체도, 말간 눈물 안고 유리창을 통과하는 영혼도 다 잊힌다. 가슴에 박히던 타인의 말이, 시선이 흐르면서 잔잔해진다. 나만의 세상에서, 버건디 색의 립스틱을 바르며, 와인 한잔을 마시며, 비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 나만의 세상에 고립되는 것, 온전히 나를 느낄 수 있는 것, 혼자여야 할 때에 과감히 혼자가 되는 것, 그것이 맛이고, 단단한 자아로 온전히 나로 사는 것이다. 행여, 다 무너지더라도 벌떡 일어나 다시 짓는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오면 릴케의 시집을 펼쳐, 아무 페이지나 읽으면 된다.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해 인내라는 걸 해야 할 때, 책이 내어준 향기는 길이 된다. 구불구불한 길은 다림질한 듯 펴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햇살 물고기는 아스팔트에서 푸득 거리며 춤춘다. 다시 세상은 열리고, 나는 신발끈을 고쳐 매어 길 위에 선다.

김정한 신작 산문집 [나는 이별하는 법을 모르는데 이별하고 있다 p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