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 김정한

인디언들의 달력에는 10월을 가난해지기 시작하는 달,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옥색에 가까운 물빛은 찰랑거리며 햇살에 반짝거리고, 척박한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나무들은 잎으로 가던 수분과 영양분을 차단하고 줄기로 보내기 시작했다. 가장 붉게 제 몸을 태우다가 수직의 파문을 일으키며 낙화한 주홍빛 단풍잎은 누구의 발자취일까. 울긋불긋 산등성이를 물들이는 이 불길은 누구의 힘일까. 불덩어리를 안아 뜨거움이 번진 가을에 노을도 길을 잃었다. 소슬하게 비는 내렸고 엄마가 좋아하는 꼬치전, 잡채, 겉절이를 만들어 엄마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잘 걷지 못하시는 엄마에게 텔레비전이 친구가 되었다. 식사도 잘 하시고 그런대로 건강하셨다. 그런 엄마를 지켜본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마의 모습을 마음속에다 스캔하며 길게 자란 엄마 손톱과 발톱을 깎아 드렸다. 괜찮다고 하시는데 표정은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8남매를 낳아 매일 뜨신 밥을 먹이며 사랑으로 알뜰히 키우셨던 엄마, 이른 새벽, 천수경을 틀어놓고 108개의 염주알을 돌리시며 자식의 행복을 비셨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거울에다가 가족사진을 포스트잇처럼 붙여 놓고, 먼저 가신 아버지, 세상에 흩어져 살아가는 자식과 손자, 손녀들을 자세히 새기셨다. 그리움도 원망도 옛말, 마른 촛농 같은 심심한 평화가 방 안을 채웠고 다 내려놓은 두 손에는 고운 기억들만 희미하게 걸쳐있다. 라디오에서는 소프라노 신영옥 씨가 애절하게 ‘나의 어머니’(Mother of mine)를 노래했다. “나의 어머니, 내가 어렸을 때 / 어머니는 내게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셨죠 / 어머니 품 안이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 있을까요? /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 어머니, 어머니는 내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너무도 큰 행복을 주셨습니다(...)” 노래가 나오는 3분 동안 무수한 기억들이 들락거렸다. 엄마에게 칭찬을 듣고 깡충깡충 뛰던 소녀시절의 내가 왔다 가고, 탐욕 가득한 손길로 채우기에 바빴던 젊은 날의 오빠도 보였고, 시간의 갈피가 두터워질 때마다 용서하지 못할 것들을 태우던 쉰 살의 엄마도 보였다. 소담한 사연들이 저절로 소환되어 머물렀다가 느릿느릿 멀어져 갔다. 왜 기억은 춥기도 전에 앙상하게 야위는 걸까. 서있는 것도 힘드시면서 ‘다 괜찮다’로 뚝 잘라 말하실까. 엄마의 눈빛은 파란만장한 풍파 한데 모아 선홍색으로 물든 가을을 닮았다.  

 

김정한 신작 산문집 [나는 이별하는 법을 모르는데 이별하고 있다 p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