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눈물을 모으고 눈물은 겸손을 가르치고

                     / 김정한 

서해바다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어요. 도전과 모험 그리고 실패의 추억이 담긴 청춘과 이별하기 위해서죠. 사무치게 아픈 청춘이라 마지막 이별은 시리도록 슬펐어요. 누군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분명히 나이는 굴레였어요. 함부로 꿈꿀 수 없는 중년의 열차에 탑승해야 하니까요. 억울하기도 했죠. 그러나 청춘의 웃음. 눈물. 기쁨. 슬픔을 고스란히 서해바다에 흘려보냈어요. 갈피를 못 잡아 더 흔들리고 방황하던 아픈 청춘이 그렇게 흘러갔죠. 더 이상의 모험도, 오기도 용납이 안 되는 굴욕도 참아내야 하는 미래의 세목들이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고 있네요. 

이럴까, 저럴까 하는 사이 석양이 깔리네요. 생의 모래시계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정말 잘 살 수 있을 텐데요. 후회와 미련이 비처럼 내리네요. 모여드는 강물 속에서 흔들리며 반짝거려요. 맞은편 밭에서는 잘 자란 푸릇한 배추가 해풍에 나풀거리며 춤을 춥니다. 수확을 앞둔 배추밭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고요. 자연은 수고에 대한 보상이 너무나 정확한 것 같아요. 농부와 배추의 아름다운 합의죠. 그래요. 무엇이든 치열하게 정성을 다해 야 끝도 좋은 거죠. 푸른 이파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춤을 추는 배추가 긍정의 표현으로 살랑거립니다.  

간절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확신, 정성, 그리고 든든한 밭이 하나가 되어야 하겠죠. 다짐에 또 다짐을 하는 사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을까. 확신이 생겼을까,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펼쳐 놓아주고 있어요. 무언가를 흘려보내고 있어요. 떠나기 싫은 듯 아픈 청춘의 잔해들이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허공 위로 날으며 춤을 춥니다. 상처를 안으면서도 강렬하게 비상을 꿈꿨던 청춘이 서서히 떠나갑니다.  

그렇게 반성과 성찰, 뭉클한 위로 한 줌을 안고 돌아오는 길에 남해안 작은 섬에 도착했어요. 환한 불빛에 맞춰 은빛 멸치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춤을 춥니다. 한여름 밤 환한 불빛을 향해 모여드는 멸치 떼가 군락을 이루네요. 그물망에 갇히기를 숨죽이며 지켜보는 어부의 기다림이 간절하고요. 아내를 잃고 세 아이와 먹고살기 위해 멸치잡이를 시작했다는 어부에게 어떤 멸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을 테지만. 어부는 바다를 품고 고기떼와 오랫동안 호흡해서 그런지 행동 하나가 조심스럽습니다. 어망에 고기가 가득하면 가득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내일을 기약하죠. 어부는 하늘이 허락한 시간에 따라 목숨을 바다에 맡기며 욕심내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고기를 잡습니다. 허황된 욕망도 두려움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을 믿으며 멸치 잡는 일에만 몰입하네요. 

오래도록 바다를 지키며 살아온 어부의 행동은 바다 낚시하러 온 강태공처럼 편안해 보입니다. 가끔 외로움이 깊으면 뭍으로 외출을 나간다고 해요. 섬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사기 위해 아니, 꼭 필요한 것이  없더라도 뭍으로 나간다고 해요. 외롭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워, 사람구경 하기위해 나간다고 해요. 그곳에 사는 어부들은 물이 부족하면 빗물을 받아쓰고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도 투정을 부리지 않네요. 뭍에서 찾아온 낯선 여행자를 보고서도 이웃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 줍니다. 생선 말린 것, 해초를 내어주며 먹어보라고 권하는데 마음이 너무 편안했어요. 그렇게 먹고 대화하며 여행자도 어부도 위로하며 위로받으니까 마음이 뭉클해지네요. 외로움도 나누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걸까요. 불안해서 중심 잡지 못하던 마음이 한줌의 위로로 평온을 찾았어요.

이렇게 모든 것은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하면서 흘러가죠. 외로움도, 풀리지 않던 고민도 잡고 싶은 욕망도 흐르면서 풀어집니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후회는 하겠지만 막 떠난 욕망, 너무나 간절해서 놓고 싶지 않았던 그 욕망이 단숨에 날아올라 별이 된듯 반짝이네요. 떠나보낼 것 미련없이 보냈으니 다시 돌아가야하는데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네요. 그럼에도 용기를 얻죠. '일 년이면 삼백일을 운다'는 바다의 거친 바람을 안고 살아가는 어부에게서 위로를 얻죠. 그 치열한 일상을 지켜보며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죠.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은. 소녀든, 소년이든, 철든, 어른이든, 철이 들지 않은 어른이든, 낯선 곳에서의 작은 경험에서 깨우침을 얻으니까요. 어부에게서도 느꼈지만 내밀한 생의 모습은 달라도 어디에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욕심내지 않고 꼿꼿한 신념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몰입하며 사는 사람에겐 좋은 향기가 나죠. 어머니의 품속 같은 바다와 정직한 어부에게서 따뜻하고 넉넉함을 배우죠. 어부의 고달픈 하루가 느릿느릿 저물 때에 바다는 하루의 고단함을 물에 수장하듯 힘껏 끌어안고요. 어부는 바다의 배경이 되고 바다는 어부의 배경이 되어 먹을 것을 주고 외로움을 줄이며 서로에게 기대죠.      

어부와 바다를 뒤로 하고 서울에 도착하니 차디찬 어둠이 내려요. 퇴근하는 지친 발걸음들이 하나 둘 집으로 향하고요. 아파트 창가에는 퇴근을 기다리는 가족의 따뜻한 마음이 전등처럼 밝혀져요. 시간이 비껴가는 곳, 빌딩 숲 속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 자리 잡은 지 40년. 오늘따라 포장마차 안에는 빈자리가 없네요. 손님이 많아도 손님이 뜸해도 무뚝뚝한 웃음으로 뜨끈한 어묵국물을 내어주는 할머니의 거친 손등은 좀 전에 헤어진 어부의 주름진 구릿빛 얼굴을 마주대한듯 울컥해져요. 10년째 찾아오는 단골손님을 보고 마음을 읽은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락국수를 내놓습니다. 진한 육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시간은 목적지를 향해 쉬지 않고 줄달음칩니다. 포장마차 안에서는 부딪치는 술잔 따라 숱한 사연이 외로운 듯 튕겨져 나옵니다. 시간을 헤집고 서러운 듯 울고 있는 아픈 기억들이 가슴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래요. 오늘만큼은 경쟁도, 다툼도, 희망도, 절망도 다 내려놓습니다. 겨울나무처럼 마음을 비우고 외로운 것들과 함께 취하도록 마셔보려고요. 취해서 비틀거리면 어떻고, 취하지 않으면 어떤가요, 이래도 저래도 한 번뿐인 생인데요. 이제는 울고 싶으면 울 거예요. 울지 않으니까, 화내지 않으니까, 눈물이 까만 덩어리가 되어 터져 나와 아팠나봐요. 후회할까봐 두려워할까봐 화난 감정덩어리를 가슴에 꼭꼭 숨겨두었으니까 아픈거죠. 생각보다 짧은 인생, 기쁘다고, 슬프다고, 화난다고, 그래서 술먹으러 왔다고 말하고 살려고요. 그저 홀로 튕겨져 나온 설운 것들을 힘껏 껴안아 보려고요. 그런데 이상해요. 취하고 싶은데 마셔도 취하지 않아요. 세상이 똑바로 보여요. 술잔에 베인 생의 독향기 때문인지 주르르 눈물만 흐르네요. 졸음이 와 눈을 비비면서도 현관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30년 전 메케한 연탄가스를 맡으며 연탄을 갈던 엄마의 얼굴도 떠오르고요. 곤지곤지 잼잼을 외치며 나를 기쁘게 해주던 어릴 적 소녀의 모습도 아른거리고  하루에도 수십번 상을 차려 손에 물마른 적이 없던 주름진 엄마의 손도 보여요. 소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 희생과 헌신을 하면서도 웃으시며 숙명이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얼굴이 겹쳐지니 시간이 멈추네요.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네요. 그래요. 늘 한걸음 늦게 찾아오는 후회는 눈물을 모으고 눈물은 이렇게 겸손을 가르치네요. 

김정한 산문집 [나는 아직 괜찮습니다 p182-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