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day
강연호 시 모음 47편/그도세상
6 김용호 2019.07.24 17:09:53
조회 131 댓글 0 신고

강연호 시 모음 47편
☆★☆★☆★☆★☆★☆★☆★☆★☆★☆★☆★☆★
《1》
9월도 저녁이면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2》
12월

강연호

그 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풍설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지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 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 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
《3》
감옥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
《4》


강연호

저 강물
내가 반쯤은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저 강물
그대도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그대가 반 내가 반 건너면
우리 강물 한 가운데서 만나
더 큰 강물되어 흐를 수도 있었으련만
돌아보면 저 강물
우리 다만 자리 바꾸었을 뿐
이쪽과 저쪽 엇갈린 채 저 강물
까마득히 손짓할 뿐
☆★☆★☆★☆★☆★☆★☆★☆★☆★☆★☆★☆★
《5》
개미

강연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좀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
《6》
건강한 슬픔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
《7》
검은 밤의 독서

강연호

그는 두꺼운 책을 읽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간단히 정의된다

그는 두꺼운 책을 읽지만
소리내어 읽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꺼운 책 속에는
두꺼운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두꺼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 같다
앙다문 입술에서 소리는 나올 수 없다
나올 수 없으므로 그가 책 속으로 들어간다
쿵, 두꺼운 책의 표지가 닫힌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답게 조용하다
☆★☆★☆★☆★☆★☆★☆★☆★☆★☆★☆★☆★
《8》
겨울의 빛

강연호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더이상 햇살은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 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
《9》
고독의 기원

강연호

지금 그의 어깨는 고요하지만
그가 잠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입자들의 미세한 파동은
어딘지 경건한 데가 있다
귀 기울이면 낮게 살얼음이 잡힌다
허나 위로 받고 싶지 않아서 그는 돌아눕는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만나는 법
눈물밖에는 없다
☆★☆★☆★☆★☆★☆★☆★☆★☆★☆★☆★☆★
《10》
고요

강연호

알전구의 필라멘트가
탁 끊어질 때의 잔광, 기억하는지
오늘 하늘의 별들은 잔광으로만 남는다
모두 우물을 안고 잠들었나보다
그래서 더 깊어 보인다
깊은 우물은 함부로 철벅이지 않는다
잔광의 고요가 깊을 때
우리 옷깃만 스쳤다고는 말하지 말자
☆★☆★☆★☆★☆★☆★☆★☆★☆★☆★☆★☆★
《11》
그늘

강연호

뙤약볕 아래 대운동장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더우면 저도 못 견디나부다 언제쯤 운동장은
제 홀로 그늘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철이 들까
그때까지 한가운데 서서 내가 그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럼 내 그늘은 ?

내 그늘은 지금 부재중이야
☆★☆★☆★☆★☆★☆★☆★☆★☆★☆★☆★☆★
《12》


강연호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을 선이라 한다
최단거리일 때 직선이라 부른다
수학적 정의는 화두나 잠언과 닮아 있다
때로 법열을 느끼게도 한다
길이란 것도 말하자면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이다
최단거리일 때 지름길이라 할 것이다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동안
점들은 언제나 고통으로 갈리고
점들은 마냥 슬픔으로 꺾여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지금
임의의 한 점 위에서 다른 점을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처음의 제 몸을
가르고 꺾을 때마다 망설였을 점들의 고뇌와 번민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
《13》
나도 왕년에는

강연호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엔 사내들 몇이서 밥 대신 소주 들이켜며
저마다의 왕년을 안주 삼고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있었나요
사내들의 뒷덜미를 움켜진 그림자 흔들리고
불빛에 배인 눈시울은 붉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쓰디쓴 왕년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사내들은 헐거운 삶을 더욱 풀어 놓았구요
내 늦은 저녁도 소주처럼 쓰고 차가웠습니다
쓰디쓴 밥알들을 입안에 털어 넣고
왕년인 듯 오래오래 씹고 또 씹었습니다
덧난 눈시울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
《14》
나무와 새

강연호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더 자라지는 않구요
거리를 떠돌던 많은 새들이
다녀갔습니다 아예 둥지를 틀지는 않구요

어느 날이라고 다를까요 나무는 언제나
머리 곱게 빗고 두 팔 흔들어
자주 지치는 도시의 새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놀다 가세요 쉬어 가세요
목이 쉬도록 불러들였습니다

오래 머물지는 않으면서 많은 새들이
놀다 가거나 쉬어 갔지만
그리고 그때마다 나무는 놀거나 쉬지도
못하고 늘 바빴지만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말라죽어 있었습니다 세월은 순간이니까요
무심한 새들은 또 어디쯤에서
놀거나 쉬고 싶었습니다 다시 날아 가려구요
☆★☆★☆★☆★☆★☆★☆★☆★☆★☆★☆★☆★
《15》
들판

강연호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먼 도시의 살림이 토하는
불빛 같은 졸음 몰려올 때마다
흔들어 깨우는 풀잎들의 칭얼거림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쉴 새 없이 따귀 후려치는
바람의 억센 손바닥
그러나 얼얼한 뺨
부어터진 얼굴의 아픔보다
그 손바닥마다 박힌 못자국들 안쓰러워
들판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
《16》
마음의 서랍

강연호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적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
《17》
멜로드라마

강연호

멜로드라마는 눈물을 쥐어짠다
멜로드라마는 손수건을 적신다

비웃지 마라
멜로드라마가 슬프다면
그건 우리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가 통속적이라면
그건 우리 삶이 통속적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만이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않느냐
적어도 그들만큼은 겪어봐야 안다
삶을 연습하고 싶다면
우리는 멜로드라마에 기댈 수밖에 없다

거룩한 멜로드라마
위대한 멜로드라마
☆★☆★☆★☆★☆★☆★☆★☆★☆★☆★☆★☆★
《18》
바닥

강연호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한밤중에 깨어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19》
바람의 정거장

강연호

이 정거장에는 푯말과 이정표가 없고
레일은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바람의 뒤를 따를 뿐
뒤를 따랐던 흔적일 뿐이다
이 정거장에서 바람은 사방에서 팔방으로 분다
세상의 모든 방향에 눈길을 두면
결국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떠나든 도착하든 이 정거장은
영원인지 잠시인지 머문 바람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이란, 일체의 수식을 무정차 통과시킨
앙금 아닌가, 문장과 구절과 행간과
행간의 여백마저, 여백의 침묵조차
스르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보낸 뒤
겨우 남은 지시어나 구구점 같은 것
그나마 문지르면 깨끗이 지워질 거다
그러니 눈으로 보려하지 말고
귀를 기우려라, 바람의 언어는 고요인가 소요인가
이 정거장은 지금
종착이자 시발이며 경유이기도 한데
다만 바람에 처분을 맡기려 대죄하고 있다
☆★☆★☆★☆★☆★☆★☆★☆★☆★☆★☆★☆★
《20》
백야

강연호

누구나 그렇듯이
더러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은 있다
하얗게 지새운다는 말뜻 그대로
창틀에 턱을 괸 채 골똘해지고 싶은 밤은 있다
멀리 나간 마음은 퉁퉁 불어터져
어둠 속에 익사하는데 우수수
별들은 쏟아져 손톱 밑에서 으깨지는데
미처 걷지 못한 밤빨래는
언제나 죽음처럼 펄럭이는데
진저리치는 전신주의 늑골마다
바람은 사무치게 훑어가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비듬처럼 쏟아지는 잠꼬대를 또박또박
받아적고 싶은 밤은 있다
한번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는
그런 밤은 있다
☆★☆★☆★☆★☆★☆★☆★☆★☆★☆★☆★☆★
《21》
벌목

강연호


나무들 울면서 숲을 떠났다

둥지는 구겨지고 새들은 몸져누웠다
철거된 살림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음산한 안개가 천천히 수의를 들고 다가왔다
즉음은 도처에서 도끼날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리운 독재 그리운 페퍼포그 그리운 함성
오오 그리운 혁명 다 지난 뒤
나무들 울면서 돌아왔다
모두 빈손이었다

이제, 숲에는 벌목당한 청춘들이
너나할것없이 심심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기억을 뜯어먹으며 산다
☆★☆★☆★☆★☆★☆★☆★☆★☆★☆★☆★☆★
《22》


강연호


1

오늘 하늘에는 소금쟁이들 가득했습니다
파문에 파문을 불러 꼼지락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새워 걸어야 할 약속처럼
파문에서 파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소금쟁이들이 젖지 않듯
파문은 물에 젖지 않습니다
오늘 소금쟁이들 가득한 하늘은 고요했지만
그대는 텀벙텀벙 물에 젖어
내내 격렬했습니다

2

별들이 불러일으키는 고요와 격렬 속에서 그대는 잠들지
못합니다 고요는 하늘의 몫이고 격렬은 다시 잠들지 못하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 아우성칠 때마다 별들은 자리 바꿔 앉
으며 그대 어깨를 다독거려줍니다 그대가 파문이듯 하늘에
도 파문은 일고 있지만 입술 깨물며 그대의 성화 견뎌내는
저 별들은 얼마나 완강한 고요입니까 젖지 않는 파문의 고요
를 배우기까지 그대는 내내 젖어야 합니다
☆★☆★☆★☆★☆★☆★☆★☆★☆★☆★☆★☆★
《23》
봄 비

강연호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오래된 흑백 무성영화
의 자막처럼 나른한 비가 내려 지난 겨울의 마른 버짐으로
남은 잔설을 녹이고 있었다 멀리 칡뿌리캐러 산을 오르는
아이들의 날궃이,종이우산이 바람에 뒤집히면 거기
유년의 나도 섞여 있었다 미나리가 툭툭 살얼음 털고 일어서는
산비탈을 따라 높거나 낮은 봉분들의 생애가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게 역력했다 가는 비에 취한 아이들은 후미진
동굴도 그냥 지나쳐가고 가물가물 죽은 사람들이 한번더 죽는
봄비가 내려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
《24》
빈들

강연호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덮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긴 실꾸리 풀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 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나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
《25》
사람의 그늘

강연호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었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다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가늠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는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웠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본 지 오래다
☆★☆★☆★☆★☆★☆★☆★☆★☆★☆★☆★☆★
《26》
사진


강연호

언제였을까 공원에서 한 컷
나뭇잎이 나뭇잎끼리 모여 뒹굴 듯
그늘은 그늘끼리 모여 뒹구는 속에서
누군가 찍어 놓은 사진 한 장
내 옆에서 웃고 있거나 눈을 감거나
콧등을 찡그린 사람들이 영 낯설다
언제 누가 불러 이 공원에 가서
오후의 한때를 렌즈 속에 붙잡아 놓았을까
햇살은 그늘 틈새로 튀밥처럼 흩어지고
저마다 고만고만하게 행복한 표정들
하지만 기억은 빛이 들어간 필름처럼 막막하다
기억도 기억끼리만 모여 뒹구는지
도무지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나는 사진 속의 나와 겨우 눈 맞춘다
끼어들지 마,사진 속의 나는
나를 힐끗 노려본 뒤 다시 표정을 잡는다
이 낡은 사진의 얼룩은 세월의 더께가 아니다
그들만의 오후를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완강한 거부의 흔적이다
☆★☆★☆★☆★☆★☆★☆★☆★☆★☆★☆★☆★
《27》
서해에서

강연호

그대 마음이 묵정밭 같아서
우리 함께 서해 바다를 보러 가자 했었지
삼각파도나 모래톱이나 칼날진 해풍쯤에
그대 마음의 뻗센 잡초 베어질 리 만무했지만
어쩌면 서해 일몰 속에 활활 타올라
화전이라도 다시 일굴 줄 알았지
우리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부산떨었는데
갯벌 기어가듯 느리고 더딘 행려
내 급한 생각만이 솟구치는 물결을 타고
지도책에서 배운 산동반도까지 헤엄쳐갔을 뿐
정작 그대는 서해로 질러가는 길을 피해
왜 자꾸 멀리멀리 돌아서 가자 했을까
서해, 죽은 바다와 황사바람 속에서
바닷새 몇 마리 사람 기척에 질려 있었지
기억해? 붉은 노을이 그대 뺨에 젖어 내리는 동안
가슴엔 듯 둔탁하게 자갈 굴러가던 것을
그대를 넘어 바다로 가는 길은 멀고멀어서
내 지친 목측 서둘러 침몰시키던 것을
그대 기억해? 오랜 세월 지나
일구어낼 마음밭 없어 황량해질 때마다
나 또한 그대 더딘 발걸음을 곰곰 헤아리듯이
☆★☆★☆★☆★☆★☆★☆★☆★☆★☆★☆★☆★
《28》
선인장

강연호

선인장에 물을 주었다
일 주일에 한 번, 딱 한 숟가락씩만 주랬는데
어쩌나 보려고 흠뻑 주었다
녀석은 불타는 갈증의 혓바닥을 어떻게 식힐까
혹시 저렇게 가시로 내뱉는 건 아닐까
궁금증을 변명 삼았지만
가학에 재미를 붙이는 동물은 확실히 인간뿐이다
선인장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갔다
누렇게 담뱃진에 물든 내 손가락 같았다
선인장을 향한 이 맹목적인 증오는 물론 헛것이다.
내 속의 갈증 내 몸의 가시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
《29》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제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
《30》
세월의 강물

강연호


내 지도 위의 눈물선을 따라 강은 흘렀네
푸른 실핏줄 촘촘하게 얽힌 저 강물
건너편엔 연좌하고 나를 불러 손짓하는 풀꽃들
죄다 아름답지만 저 강도 어제 건넌 그 강 같아서
산을 넘어뜨리는 힘으로 나 고개 떨구어야 했네
세상은 넓고 넓어서 내 부르는 노래는
메아리를 이루어 화답하지 못했네 지나간 달력에
또렷이 새긴 동그라미 두어 개는 무슨 날짜를
기억하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네
오 날짜의 파문 물결의 파문을 일으키며 세월은 가고
세월은 가서 세월은 가나 세월은 가도 세월은 가지만
때로 삶은 시시했고 그래서 나는 시를 썼고 때로
시도 시시했지만 시시한 시를 쓰다가 밤을 새운 새벽이면
아무에게나 전화하고 싶었고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네 전화번호부책만큼 두꺼운 추억은
그 새벽 어디에도 깨어 있지 않았네
추억은 말하자면 무수히 몸에 달라붙은
도깨비풀 같은 것이었는데 추억은 말하자면
은행에서 잠자는 몇백 원쯤 남은 휴면계좌 같은 것이었는데
밤 기차가 천천히 기적을 끌고 가서
떼어내고 떼어내도 남는 이명처럼 나 너덜거렸네
오오 이 악물어 견디면 실핏줄 촘촘한 저 강물
죄다 터져 넘치겠네 내 지도 위를 범람하겠네
☆★☆★☆★☆★☆★☆★☆★☆★☆★☆★☆★☆★
《31》
술과의 화해

강연호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 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
《32》
슬픈 일만 나에게

강연호

사랑은 언제나 조금씩 늦게 온다 박정만 시인이 간
뒤 나는 종로서적에서 처음으로 그의 시집을 만났다 그
는 우주로 떠났다는데 그의 시집은 이제야 내 책꽂이에
꽂히고, 안타까웠지만 언제나 사랑은 조금씩 늦게 온다
생전에 슬픈 일만 있어 달라고 생떼를 썼다는 그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정작 슬프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남은
사람들이 슬퍼 그의 시집을 읽으면 누구든지 더 이상
우주가 어둡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그가 그토록 아껴
닦았다는 램프를 켜 들고 저기 우주의 한가운데 길 밝
혀 서 있을 것이므로
☆★☆★☆★☆★☆★☆★☆★☆★☆★☆★☆★☆★
《33》
식당에서

강연호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하고 신문을 펼치는데
탁자 위 누군가 떨구어놓은 김치 국물 한 방울이
그리고 거기 머뭇머뭇 다가서는 파리 한 마리가
음식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을 죽이는 내 시선을 자극한다
문득 인간의 생애란 게
삼류 멜로물이거나 위대한 서사거나
미처 닦아내지 못한 저 김치 국물 한 방울처럼 치민다
또는 그걸 먹어보겠다고 내 눈치를 살피는 파리 같기도 하다
나는 펼쳐든 신문으로 김치 국물을 닦아낼 수도 있고
척척 접어 파리를 때려눕힐 수도 있지만
홀연 허기마저 잊고 녀석과의 눈싸움에 몰입해보기로 한다
그 긴장의 거리가 나를 현현시킨다
☆★☆★☆★☆★☆★☆★☆★☆★☆★☆★☆★☆★
《34》
신발의 꿈

강연호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 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헤어져 저렇게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
☆★☆★☆★☆★☆★☆★☆★☆★☆★☆★☆★☆★
《35》
언어의 꿈은 바깥에 있다

강연호

혀끝에 머물던 격렬함이 사라지자
그는 무덤처럼 입을 다문다

그의 침묵 속에는
그가 겨누었던 대상을 향해
파르르 떨며 날아간
그러나 결코 적중하지 못한 흔적이
우울한 갈증에 섞이고 있다

그의 꿈은 바깥을 향하지만
한때 그를 긴장시켰던
오금 저리고 팔뚝마다 소름 돋았던
몸밖의 세상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거미줄에 걸린 거미처럼
축축한 사유의 달팽이처럼
제 몸이 바로 존재의 짐이라는 것

모든 언어에는
제 몸을 쥐어뜯은 상처가 있다
☆★☆★☆★☆★☆★☆★☆★☆★☆★☆★☆★☆★
《36》
울음

강연호

새벽 두 시인데 아니 세 시인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끈질긴 울음처럼 우는
전화벨, 아무도 받지 않는다 벽을 타고
수도관을 타고 화장실의 통풍구를 타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화벨이 오르내린다

나는 돌아눕지만 전화벨은
돌아눕지 않을 작정인 듯 열두번도 더 운다
제발 좀 받아라, 얘기라도 들어봐라
받아줄 수 없는 어떤 사연이 더 절절한지도 모르는데
어떻든 나는 다시 잠들고 싶다

한참을 울다 겨우 찾아드는 전화벨
그 뒤끝을 채며 이제는 거실의 냉장고가 운다
시계바늘이 운다 보일러가 운다
한 아이가 우니까 다른 아이가 운다 다들 따라 운다
울음은 전염병이다, 커다란 악기의 공명통처럼
온 아파트가 덩달아 온 도시가 끈질긴 울음을 운다

그 속에서도 악착같이 잠을 청하는 나
나란 놈이 싫어지는 밤이다
☆★☆★☆★☆★☆★☆★☆★☆★☆★☆★☆★☆★
《37》
월식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
《38》
음악

강연호

그때 음악과 시가 있는한
영원한 청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우리가 쏘다녔던
골목과 천 변은 빛났던가
아니 한 장의 나뭇잎조차 빛나지 않았다
우리가 빛이었으므로
가슴 근처에 잡히는 멍울은
울음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기는 울음이 곧 음악 아닌 적 있었던가
다만 슬프지도 격렬하지도 않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썼고
그래서 한 번도 청춘인 적 없었다
진작부터 붉은 노을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묻는 안부처럼
무심한 듯 갑자기 가슴을 치는 것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
《39》
저 별빛

강연호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
《40》
저문 길

강연호

사람 기척에 놀라 그만 막다르게 입 다문 길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삼가 열며 걸었습니다
적소 따로 없어 세상의 집들 웅크린 채 잠들고
불 꺼진 창에서 풀풀 새어나온 어둠이
길을 끌어가는 포플라 행렬 흔들어 어지럽혔습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생각은 숨가쁘게 달려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까지 데불고 오곤 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작정한 만큼 가지 못할 산책이었을까요
귀찮아도 같이 걷자며 어깨를 치는 시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은 힘겨웠으니
그리 알고 지내라고 이만 줄인다고
밑도 끝도 없는 엽서 한 장 우체통에 넣을 때
가슴 한 쪽이 먼저 둔탁한 소리로 떨어져내렸습니다
바라보면 저기 돌아가 지친 몸 뉘어야 할 거처가
자꾸만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
《41》
적멸(寂滅)

강연호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 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 동안 베껴 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
《42》
절벽은 절박하다

강연호

여기서 길을 버리면 어떡하냐는
내 건짜증만으로도
절벽은 무너질 기세로 콜록거렸다
침묵이란 사실 이런 거 아니냐는 듯
울컥 명치 끝에 걸린 멀미 넘어오지 않고
바람은 마음 속에서만 소용돌이쳤다
저기 위태로운 칡덩굴 하나
목숨 건 곡예 부려 바위를 쪼개는데
아, 진짜 침묵은 말 없어도 바위를 쪼갠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날들 더 지나야
내 들끓는 욕망은 투신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말 없는 사내 될 거라며
두 주먹 불끈 쥐어보지만
늘 그렇듯이
세월은 지나간 세월만 세월이고
너무 지루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고
늘 그렇듯이
지금쯤은 침묵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마다
절벽 앞에 선 기분이고
절벽은 그래서 언제나 절박하다
☆★☆★☆★☆★☆★☆★☆★☆★☆★☆★☆★☆★
《43》
첫눈

강연호

죽은 자의 빈집에
산 자들이 다들 모여 왁자지껄 신이 난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웃음이 없던 그가 영정 속에서 웃고 있다

첫눈이, 아 첫눈이
조등을 적시며 밤새 내릴 기세다

이 세상의 눈은 모두 첫눈인 듯 반갑고
이 세상의 사랑은 모두 첫사랑인 듯 그립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울고 싶었던 그는 왜 죽자고 웃고 있는가

그럼 울어 첫눈인데
우아한 용서는 첫눈이 다 한다

정말 이 세상의 죽음은 모두 첫 죽음인데
초상집의 소주는 왜 이리 늘 달디단가

산 자들은 저마다 살 궁리에 바빠 돌아가고
죽어 빈집을 나온 그는 노숙이 걱정이다
☆★☆★☆★☆★☆★☆★☆★☆★☆★☆★☆★☆★
《44》
행복

강연호

이제는 행복해졌느냐는 안부가 그에게 온다
혓바늘이라도 일 것 같은 저녁의 비애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질문의 풍경
행복? 그가 낮게 되뇌여 보는 입술의 움직임을
귀청이 따라가다 포기한다
별들이 빛나 보이는 건 멀리 있기 때문일까
멀리서는 그 역시 빛나 보일까
생각은 삼십 촉 알전구보다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한때는 그에게도 서늘한 추억이었을
연애나 정열 같은 것들이
읽다 놓친 신문의 부고란 같이 싸늘하다
기를 쓰고 행복해지고 싶었고
어쩔 수 없이 행복해져야 했지만
그는 안부가 숨겨놓은 행간이 문득 궁금해진다
세월은 늘 너그럽지 않았다고
자책인지 불화인지 뚜렷하지 않은 날숨이 터진다
행복이라는 낱말 근처에는
그의 눈시울을 적시는 무엇인가가 어려 있다
그는 이제 주간지의 현란한 고백처럼 텅 빈다
☆★☆★☆★☆★☆★☆★☆★☆★☆★☆★☆★☆★
《45》
허구한 날 지나간 날

강연호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만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
《46》
환승역

강연호

지하철 환승역, 갈아타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기차든 비행기든 직장이든 혹은 여자든
갈아타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은 없다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다
삶은 문득 놓친 실끝 같은 거니까
삶은 언제나 끝장내고 싶은 거니까
삶은 늘 가려운 거니까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어서
사람들은 더러 이쪽 저쪽 헤매기도 하고
열차에 받혀 공중들리기도 하고
열심히 긁어대기도 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환승역에 복작복작 모여들지만
갈아탄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47》
흔적

강연호

새가 날아가자 나뭇가지 부러졌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한참 뒤에 문득 생각난 듯이 부러졌네
모든 게 흔적이네
무수한 나무들 중에 그 나무를
무수한 나뭇가지들 중에 그 가지를
선택하고 선택받은 운명의 흔적이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
새는 날아가도 흔적은 남네
그 여운 고스란히 견뎌내려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용쓰다가, 용쓰……다가
나뭇가지 기어이 부러졌네
흔적의 무게 견디지 못했네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네
날이 갈수록 흔적은 무게를 더하네
아무도 흔적을 지탱하진 못하네
이 정도 흔적의 무게쯤
너끈히 견딜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시절
내게도 있었네, 아니 정말 있었나?
잘 모르겠네 기억나지 않네
그것 역시 흔적이네
☆★☆★☆★☆★☆★☆★☆★☆★☆★☆★☆★☆★




1

파워링크 AD
등록 안내

페이스북 로그인
꾸미기
제목 작성자 조회수 작성일
좋은글 아침메일 서비스 종료 안내  (13)
중복글 관련 안내드립니다(2019.07.01)  (4)
[필독] 저작권 관련 게시글 삭제 처리 기준 (2017.02.15 링크 추가)  (21)
좋은글 게시판 이용안내  (14)
우리의 사랑은  file 모바일등록 new 가을날의동화 25 01:20:15
인생의 세가지 여유로움  file new 가연사랑해 22 01:17:56
나이가 들어도 청춘처럼 사는 것  file new 가연사랑해 25 01:12:37
술과 사랑   new 강아지 19 00:18:01
행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   new 강아지 29 00:17:20
첫 마음   new 강아지 23 00:16:41
빵 냄새가 있는 풍경  file new 대장장이 68 19.12.13
꽃과 인생   new 도토리 79 19.12.13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날 수 있다면   new (1) 산과들에 99 19.12.13
따뜻한 멸치 국물   new 산과들에 53 19.12.13
아무소리 없이 밀려 들어오는 배   new 산과들에 49 19.12.13
엄마   new 도토리 32 19.12.13
그곳   new 도토리 30 19.12.13
[오늘의 명언]타협의 위험성을 알려 주는 명언 4가지  file new 책속의처세 61 19.12.13
눈의 시인  file new 대장장이 86 19.12.13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file new (2) 하양 149 19.12.13
나무가 있는 풍경  file new (2) 하양 97 19.12.13
들꽃 이야기  file new (2) 하양 91 19.12.13
눈이 내리는 날  file new (1) 대장장이 112 19.12.13
가슴에 남는 사람   new 네잎크로바 137 19.12.13
글쓰기
 
행운의 다이아몬드~ 클릭하시면 포인트 5점을 드려요~
Copyright ⓒ EZHLD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