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자존심이다.

남자는 운전하고 가다가 길을 잃어도, 여간해서 중간에서 차 세우고 잘 물어보지 않는다.

옆에서 아내가 무어라고 잔소리를 해도 완전히 첩첩산중, 오리무중에 몰릴 때까지

일단은 이를 악물고 가 본다.

자존심 때문이다.

몰라도 쉽게 모른다고 해선 안 되는, 그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다.

쓸데없고 유치한 것이라고 비웃어도 좋다.

그게 남자 가슴 속에 숙명처럼 자리하고 있는 질긴 자존심인 것을 어떡하나?

그런데 그 무모한 고집이 때로는 대박을 터뜨린다.

사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미 신대륙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황금의 땅 인도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전혀 목적지와는 다른 곳에 다다랐을까?

그건 중간에서 멈추고 남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는 남자의 고집 때문이었단다.(남자들의 고집을 풍자한 미국의 조크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가족, 친지, 부하들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도 한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중간에 조금만 남의 충고를 들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네 남자들은 그냥 미친 듯이 달려 버린다.

브레이크는 남자답지 못한 것이요, 액셀러레이터만이 사나이의 길이라고 믿어서다.

그래서 쓸데없는 시간 낭비, 돈 낭비, 에너지 낭비, 나중에는 목숨까지도 낭비해 버린 일들이

남자들의 역사에는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다.

니체가 말한 대로, 알면서도 여전히 같은 바보스러움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련가?

자존심으로 사는 남자의 가슴에는 본능적으로 투사의 불꽃이 이글거린다.

남자는(인텔리요, 엘리트라 해도) 모두 싸움을 잘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모여 앉으면 항상 자신들의 무용담(?)을 상당히 과장해서 떠벌리길 좋아한다.

입으로는 폭력이 나쁘다 하면서도 은근히 조폭 문화를 힐끗거린다.

우리네 남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액션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쓴다.

아버지세대는 존 웨인과 게리 쿠퍼의 멋에 취했고,

386세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소룡과 성룡을 흠모하며 컸다.

약한 자를 도와서 절대 다수의 악한들을 응징하며 하늘을 붕붕 나는 바바리 코트의 김두한을

꿈꿔 보지 않은 사내아이가 있었을까?

스포츠도 건강을 위해,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 스코어보드가 울리는 그 순간의 쾌감을 위해 미친 듯이 몸을 던진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늘어나도 상관하지 않고 무모하게 달려든다.

이길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남자는 개의치 않고 웃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1등 하는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오호 통제라.

승자는 하나뿐인 것을 어찌하랴.

한 명의 찬란한 승자를 만들기 위해 쓸쓸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수 많은 패자들의 아픔....,

용의 꼬리가 되기 싫으면 닭의 머리라도 돼야 속이 풀린다.

일류 리그가 안 될 것 같으면 이류, 삼류라도 가서 내가 대장이 되어야 한다.

세계와 경쟁하는 것이 두려우면 개방을 주저하고 나라의 문을 꼭꼭 잠그는 수밖에 없다.

일류 앞에선 꼼짝 못하다가도, 이삼류들 앞에 가서는 목에 힘주고 뻐기는 이중적인 모습,

그것이 우리네 남자들 아닌가?

종이 한 장 차이의 교만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는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사는 것이다.

- 한홍 지음 <남자는 인생으로 詩를 쓴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