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인 순간 나를 만나다

               / 김정한

앞만 보고 걷고 달리기만 했던 나에게 독감은 신이 선물한 고마운 선물입니다. 일주일 병가를 내고 은비령 고개를 넘기로 했습니다. 산과 바다는 나에게 삶의 동반자라 생각하는데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차를 타면 바다는 쉽게 갈 수 있어 평탄했던 지나온 내 삶을 보는듯하고 산은 오르고 내려오는 일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평탄하지 않았던 내 삶의 한 부분을 보는 느낌입니다. 주로 바다로 많이 가지만 삶의 한계상황을 느낄 때에는 산으로 갑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인내심도 키우고 아니 더 쉽게 말하면 단단하고 독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며칠 꽉 막힌 터널에 갇힌 느낌이 들어 숨쉬기도 힘들 만큼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것이 감기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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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만 끙끙 앓다가 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픈 몸을 이끌고 차를 끌고 한참을 달렸는데 '여기서부터 강원도입니다' 라는 표지판을 보고 나니 그제서야 편안해졌습니다. 소양호로 갈까 인제로 갈까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곳이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은비령'입니다. 작심하고 은비령을 넘기로 했습니다. 한계령을 넘을 때는 내 인생의 험난했던 벼랑 끝 순간이 떠오릅니다. 마치 내 인생의 고비를 보는 느낌입니다. 한계령을 타는 내내 길은 꺾어지고 또 꺾어졌습니다. 조금만 벗어났다가는 어디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괴로움과 고통이 따르는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계령 정상에서 양양으로 가는 고갯길을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바른길, 굽은 길을 멀미를 해가며 수차례 넘고 나니 귀둔마을로 들어서는 은비령을 만났습니다. 작가가 소설화하기 이전에는 은비령이란 이름조차 없었던 곳. 작가가 지도를 바꾼 셈이지만. 자동차도 사람도 길도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인제와 양양을 연결하는 고개가 한계령이라면 은비령은 그 샛길입니다.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을 만난 듯 필례약수터에 도착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 머물던 그곳 '은자당' 자리에 필례 약수터가 있었고 붉은색 조롱박으로 물을 마셨습니다. 비릿한 맛과 톡 쏘는 맛이 탄산수 같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자작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열도 많이 나고 머리도 아프고 정말 견딜 수 없는 감기인데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몸도 새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운 픙경에 취해 버려 시간까지 멈춥니다. '은비령 세상은 멈추어 서고 2500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은비령에 갇혀 우주 공간의 사랑에 빠진 남녀가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라는 소설속 이야기처럼...... 소설 속 장면을 더듬다 보면 은비령의 신비로움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무아의 경지에 이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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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좋은 건,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생활과 달리, 그저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일탈의 편안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느리게 걸으며 가슴으로 느끼는 여행은 걷다 보면 인생을 배우며 찾아가게 되고 걷는 것에 몰입하다 보면 지나온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한계령을 지나는데 도로 곳곳이 지난해 수해로 유실되어 여전히 복구 중입니다. 이 또한 쓰러지고 실패한 상처받은 내 인생의 아픈 흉터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결국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수정하는 기회를 갖는 숙려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연을 보면 볼수록 내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연상하게 됩니다. 사람과 비슷한 삶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의 법칙을 바라보며 욕심내지 않고 느림의 미학으로 더 반듯하게 따뜻하게 살리라 다짐해 봅니다. 한계령 정상에서 바라본 설악산의 장엄한 풍광과 저 멀리 동해바다의 모습은 나를 찾기 위해 떠난 최고의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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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잘있었나요 내인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