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8 / 김별

숱한 밤길을 걸어 왔건만

이제 남루해져버린 몸으로는

여기까지 인도해 준 별을 지켜 주지 못하듯이

이 가을은 마지막 향기를 토하고 사라져 갈

꽃의 임종을 지켜주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상의 꽃들이 사라지면

더 기대할 무슨 아름다움이 있으랴만

조용히 등불을 끄듯

생에 남은 하루를 무심히 접으려 합니다.

이런 밤은

바람도 잠들지 못하고 유리창을 덜컹덜컹 흔듭니다.

비는 내리고

새벽이 되어서도 베갯잇을 적실 당신

행복보다 눈물을 먼저 배워버린 사랑 앞에

무엇인들 즐겁고 그 마음을 채워줄 수 있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들

손끝으로 느껴지는 것들까지

모두가 무료하고 입맛을 잃어버린 닝닝한 날들

놓아버린 세월이야 부질없는 약속 같다 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짧은 생을

무심한 강물에 돌처럼 던져버렸다 해도

이루지 못할 사랑이면 이승인들 후련히 떠날 수 있을까요.

더 원할 것도 더할 것도 없다 해도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한 죄스러움이

바위를 진 듯 무겁고 그믐인 듯 어둡습니다.

고단한 일상의 끝을

평화와 안식으로 넉넉히 채워주던 저녁 어스름마저

오늘은 축축이 내린 비에 젖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일이

때로 낮달처럼 잠들지 못하고

혼자 아픔을 감당하는 차마 못할 노릇이지만

덤덤하게만 살 수 없는 약해져만 가는 목숨의

마음을 비우는 일이

비어버린 쌀독보다 어둡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너무도 맑고 아름다워

오히려 송곳보다 아팠습니다.

물에 빠진 이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것처럼

안타깝고 죄스러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를 쓰고 바람 부는 언덕에 앉아 꽃잎처럼 뿌리는 일

그 외 곰팡내 나는 어두운 골방에 숨어 두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눈물을 적시는 것

밤새 울음을 삼켜야만 하는 그 설움을 무엇으로 잠재울 수 있었을까요.

겨울이 오기도 전부터 이미 봄을 기다리는 오랜 습관이

요즘은 다시 도지는 병처럼 깊어져

다가올 계절은 나로 하여

또한 당신으로 하여

더 스산할 듯합니다.

하고 싶은 말들이 태산처럼 쌓여있건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낙엽처럼 태울 수도 없어

한 자도 적지 못한 백지를

그만 접어야 할 밖에 달리 무슨 도리가 있을까요

낙심한 마음

부서져버린 마음이라 해도

부디 편안하고 노엽지 말시기를

다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청정의 삶을 세우시기를

돌탑에 돌 하나를 얹는 마음으로 간절하건만

그 마음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겹으로 아픔이 전해집니다.

그렇게 아무리 흘러도 줄지 않는 강물처럼

태산 같은 실타래 한 올도 풀지 못한 사연을 이만 접습니다.

미안한 마음

죄스러운 마음으로 전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 믿지 않지만

꼭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밤 강물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나도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안녕 지우지 못한 그리움을 기어이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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